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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기자신문] 제명된 한동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국민의힘 지도부가 한동훈 전 대표에 대한 제명 결정을 최종 확정했다는 소식은 한국 보수정치의 분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내부 ‘당원 게시판 논란’을 둘러싼 갈등은 결국 최고 수위 징계인 제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국민의힘의 내홍을 극대화했다. 한 전 대표는 제명 직후 기자회견에서 “제명해도 나의 정치적 열망과 좋은 정치를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복귀 의지와 정치적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정치적 과장이나 발언이 아니다. 그는 이미 정치적 위기를 돌파의 기회로 삼으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 정치적 분열을 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한동훈 전 대표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자신만의 ‘정치적 정체성’과 방향이다. 기존 국민의힘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지금, 그는 단순히 기존 지지층을 결집하는 것 이상의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첫째, 당내 복귀와 재통합의 길이다. 단순히 복귀 의지를 밝히는 것에서 나아가, 국민의힘 내의 다양한 세력과의 진정성 있는 대화와 정책적 조율이 필요하다. 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조직력과 결속력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 전 대표가 무조건적인 대립만을 고집한다면 그의 정치적 고립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둘째, 만약 당내 구조적 한계가 극복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새로운 정치 플랫폼을 모색할 필요도 있다. 이는 단순한 신당 창당이라기보다는 정책 연대와 가치 중심의 정치 연합을 형성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보수 진영의 위기와 분열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문제이므로, 그 틈새를 메우는 정치적 비전 제시는 오히려 새로운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 공론장의 역할과 리스크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번 제명 사태의 핵심 쟁점은 ‘당원게시판 논란’이라는 다소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문제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단지 한 개인의 실수나 논란을 넘어 디지털 공론장과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확대됐다. 한 전 대표가 이 문제를 단순히 방어 논리로만 접근한다면 향후 정치적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그는 공개적으로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책임과 절제의 정치적 실천을 요구한다. 따라서 공론장의 책임,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 정보의 투명성 등 이번 사태가 던진 질문에 대해 성찰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시대적 흐름을 읽는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 정치는 극심한 분열과 양극화를 겪고 있다. 정당 내부의 갈등은 물론, 사회 전체의 정치적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동훈 전 대표가 주목할 만한 것은 정책과 담론 중심의 리더십 회복이다. 단순한 정치적 감정싸움이나 인물 중심의 논쟁을 넘어서, 국민이 직면한 현실 문제 - 경제, 사회안전망, 공정 경쟁 - 에 실질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스토리텔링과 공감 능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는 이미 법조인 출신으로 정책적 전문성과 강단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정책과 가치 중심의 소통이 전략적 자원이 되어야 한다. ■ 마지막으로 - 역사적 비판과 성찰 한동훈 전 대표의 제명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몰락사나 복귀전이 아니다. 이는 한국 보수정당의 정체성 위기와 정치문화의 성찰을 촉발하는 사건이다. 그의 정치적 선택은 보수 진영 전체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갈등과 분열은 이미 구조적 문제로 드러났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재구성할 것인가가 향후 정치 지형을 결정할 것이다. 한동훈 전 대표가 선택해야 할 길은 결국 정책적 책임, 정치적 화해, 그리고 미래 비전 제시로 나아가는 길이다. 단지 당복을 다시 입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 필요하다. 그가 이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는 그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과연 한동훈 전 대표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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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대한기자신문]“선사시대 vs 역사시대” 어떻게 구분할까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최근 정치권에서 불거진 “환단고기” 관련 발언을 계기로, 대중의 시선이 다시 한번 “우리 역사는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으로 향하고 있다. 논쟁의 핵심에는 늘 같은 물음이 놓여 있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는 과연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과학적인가, 아니면 해석의 문제인가.? ◆선사시대: 기록 이전의 인간, 물질로 말하다. 선사시대(先史時代)는 말 그대로 문자 기록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대를 뜻한다. 이 시기의 인간은 글을 남기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의 삶은 유물과 유적을 통해서만 복원된다. 뗀석기와 간석기, 토기, 주거지 흔적, 무덤 양식이 주요한 증거다. 구석기·신석기·청동기 같은 구분 역시 연대가 아니라 기술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기준으로 한 고고학적 분류다. 즉 선사시대 연구는 문헌이 아니라, 층위·방사성탄소연대측정·비교고고학 같은 과학적 방법에 의존한다.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근거는 물질에 있다. ◆ 역사시대: 기록이 시작되다. 반면 역사시대(歷史時代)는 문자가 등장하고, 기록이 남기 시작한 시점부터를 가리킨다. 왕의 이름, 연대, 사건, 제도, 전쟁과 외교가 문헌으로 전해진다. 이때부터 우리는 “추정”이 아닌 “서술”을 할 수 있게 된다. 중요한 점은 역사시대의 시작 시점은 지역마다 다르다는 사실이다. 메소포타미아는 기원전 3000년경 설형문자로 이미 역사시대에 진입했지만, 한반도는 일반적으로 고조선 후기 혹은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시점부터 역사시대로 본다. 이는 ‘문자의 존재’뿐 아니라, 동시대 외부 기록과의 교차 검증 가능성이 함께 고려되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기록’이면 모두 역사인가? 여기서 논쟁이 시작된다. 환단고기와 같은 문헌은 분명 ‘글’로 쓰여 있다. 그러나 학계는 이를 역사시대의 1차 사료로 인정하지 않는다. 이유는 명확하다. 첫째, 성립 시기와 저자가 불분명하다. 둘째, 동시대의 교차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셋째, 고고학적 자료와 연속적으로 맞물리지 않는다. 역사학에서 중요한 것은 ‘기록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기록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가다. 그래서 역사시대란 단순히 글자가 등장한 시점이 아니라, 검증 가능한 기록 체계가 성립된 이후를 의미한다. ◆ 선사와 역사의 경계는 단절이 아니다. 자주 오해되지만,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는 서로 끊어진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선사시대는 역사시대의 토대다. 청동기 문화 없이는 고조선도 없었고, 집단 거주와 권력 분화 없이는 국가도 탄생하지 못했다. 문제는 이 연속성을 신화나 민족주의적 서사로 과도하게 확장할 때 발생한다. 학문은 상상력을 배제하지 않지만, 검증을 우선한다. 역사와 신화는 모두 과거를 말하지만, 사용하는 언어와 규칙은 다르다. ◆ 지금 필요한 것은 구분이다.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구분하는 일은 과거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과거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정치적 발언이든 대중 담론이든, 이 구분이 흐려질수록 논쟁은 감정이 되고, 학문은 설 자리를 잃는다. 역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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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5
  • [대한기자신문] 세상에서 제일 높은 벽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세상에는 수많은 벽이 존재한다. 도시의 고층 빌딩 사이에 세워진 회색빛 콘크리트 벽, 나라와 나라를 갈라놓는 국경의 장벽, 그리고 마음과 마음을 나누지 못하게 막는 감정의 벽. 그중에서도 가장 높고, 가장 단단하며, 쉽게 무너뜨릴 수 없는 벽이 있다. 바로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 사이에 생기는 벽이다. 이 벽은 돌멩이로 쌓지 않는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 외면하는 눈빛 하나가 벽돌이 되어 차곡차곡 쌓여간다. 처음에는 작은 균열로 시작한다. “그냥 피곤했을 뿐이야.” “이해하겠지.” 그렇게 넘겼던 일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어느새 서로를 가로막는 거대한 벽이 된다. 그 벽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두껍고, 차갑다. 이 벽의 무서운 점은 사랑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다. 원래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던 두 사람이었기에, 그 벽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함께 웃던 기억이 오히려 상처가 되고, 나란히 걸었던 길이 이제는 서로를 외면하는 길이 되어버린다. 벽은 그렇게, 두 사람의 추억을 담은 공간 위에 서서히 높아진다. 시간이 지나면 이 벽은 단순한 다툼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풍경이 되어버린다. 말하지 않아도 침묵이 익숙해지고, 다가가지 않아도 편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게 된다. 그렇게 서로를 향한 마음이 식어버리면, 남는 것은 ‘함께 있음에도 외로운 공간’뿐이다.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벽이자, 가장 슬픈 벽이다. 하지만 이 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벽을 쌓는 것도 사람이듯, 그것을 허물 수 있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한쪽이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고, 작은 대화를 시도할 때 - 그 벽에는 금이 간다. “괜찮아?”라는 한마디, “미안해.”라는 진심, 혹은 단지 따뜻한 눈빛 하나가 벽의 한 부분을 무너뜨릴 수 있다. 완벽한 화해가 아니더라도, 서로의 존재를 다시 바라보려는 순간 그 벽은 조금씩 낮아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높이를 체감할 수 있다. 그 벽을 낮추는 일은 사랑을 다시 배우는 일이고, 이해를 다시 시도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관계 회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마음속에 벽을 세우며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한 용기란 그 벽 뒤에 숨지 않고, 그 너머로 다가가려는 시도 속에 있다. 세상에서 제일 높은 벽은 결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자존심과 두려움으로 쌓인 벽일지도 모른다. 오늘, 그 벽에 조용히 손을 대보세요! 차가운 표면 너머로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면, 그 벽은 아직 완전히 닫힌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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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1
  • [대한기자신문] 옷은 사회적 언어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과 스쳐 지나간다. 대화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을 무의식중에 평가한다. 그 근거는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옷차림'이다. 말은 하지 않지 않았지만, 이미 옷이 먼저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옷이 날개다"라는 말을 가볍게 넘기지만, 이 말 속에는 깊은 진실이 담겨 있다. 옷은 단지 몸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다. 나를 표현하고, 나를 설명하며, 때로는 나를 보호하는 "비언어적 메시지"다. 옷은 말보다 먼저 사람의 인상을 결정짓고,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조심스레 알려준다. 그래서 옷은 사회적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첫째, 사람은 옷을 입고, 옷은 사람을 드러낸다. 면접장에 들어서기 전, 우리는 거울 앞에서 정장을 고쳐 입는다. 단정한 셔츠 깃, 반듯한 넥타이, 구두에 먼지가 없는지 살핀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보다 먼저 '신뢰'를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반대로 편한 친구들과의 모임엔 조금 자유롭고 캐주얼한 자림으로 나간다. 이 역시 "편하게 대하고 싶다"라는 메시지다. 이처럼 우리는 상황에 맞춰 옷을 고르고, 그 옷은 다시 우리의 태도를 설명해 준다. 결혼식장에서 화려한 옷은 축하의 의미이고, 장례식장의 검은 옷은 애도의 표현이다. 사회적 예의, 역할, 의도를 담은 메시지가 고스란히 옷을 통해 전달되는 셈이다. 둘째, 패션, 곧 정체성과 소속감의 표현 청소년이 입는 교복, 노동자의 작업복, 경찰이나 소방관의 제복도 단지 기능적 옷이 아니다. 각기 다른 역할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종의 "사회적 표식"이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는 옷을 통해 자신의 개성, 정치적 성향, 취향, 심지어 세계관까지 표현한다. 스트리트 패션을 즐기는 청년들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자유와 저항을 말하고, 간결한 미니 멀룩을 선호하는 이들은 절제된 세련미를 구축한다. 명품 브랜드로 온몸을 장식한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반영돼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옷이 반드시 비싸야 의미가 생기는 건 아니다. 깔끔하고 정갈한 옷차림은 자신에 대한 존중,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를 담는다. 잘 다려진 셔츠, 깨끗한 운동화, 어울리는 색상의 조화만으로도 긍정적인 인상을 충분히 줄 수 있다. 셋째, SNS 시대, "보여주는 옷"에서 "말하는 옷"으로 오늘날 옷의 의미는 더욱 커지고 있다. 특히 Instagram이나 YouTube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는 옷이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다. 매일 올라오는 사진 속 옷차림은 그 사람의 라이프 스타일을 말해주고, 팔로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소통 수단이 된다. 옷은 이제 단순한 외형을 넘어, 디지털 공간 속의 자아를 표현하는 상징이 된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싶은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옷으로 표현된다. 즉, 옷은 단순히 외적인 치장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해석이자 사회와의 대화 방식이다. 넷째, 옷을 고른다는 것은 "메시지를 선택하는 것" 우리는 아침마다 옷장을 열고 하루의 언어를 고른다. 때로는 신중하게, 때로는 무심히. 그러나 그 선택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어떤 옷을 입느냐에 따라 내가 사회와 맺는 관계의 색채가 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옷을 단지 '유행'이나 '취향'으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나는 오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이제 패션은 더 이상 패션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언어'이자 '태도'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늘 어떤 언어를 입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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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12
  • [대한기자신문]대한민국 최악의 SKT 해킹 사고,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 쉽게 설명합니다!
    사진: sk유심칩 AI이미지/대한기자신문 [대한기자신문 박현수 기자]해킹으로 SK텔레콤의 고객 유심 정보가 유출된 사건이 발생한 지 이번주로 3주 차에 접어들었다. 현재 정부 주도로 민관 합동 조사가 이뤄지고 있고 개인정보보호위원회 차원에서도 조사도 한창 진행중이다. 하지만 정확한 피해 규모와 구체적인 사고 경위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아 현장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무분별한 정보가 범람하고 있다. 이에 대한기자신문에서 본 해킹사건을 독자들에게 보다 더 알기 쉽게 설명하고 2차 피해를 최소화 하고자 합니다. 이번 최악의 해킹 사고로 SKT가 받을 제재 역시 사상 최고 수위가 될 전망이며, 이에 SK 최태원회장까지 직접 나서서 사과하는 등 여파가 적지 않을 전망이다. 현재 개인정보보호법을 보면 과징금 상한액은 전체 매출액의 3%로 알려져 있는데 이를 작년 SKT 매출액이 5,300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어 과징금만해고 무려 16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청문회 개최 지난 30일 국회에서 관련 청문회개 개최됐다. SKT 유영상대표, 류정환 부사장이 증인으로 참석해 이번 사고에 대한 유감과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과를 했습니다. 현재 SKT를 사용하는 가입자 전체의 2,500만 명의 개인정보가 유출됐을 가능성도 대비해서 대책을 수립중이라고까지 밝혔습니다. 이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 사상최대의 해킹사고 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 해킹 사고에서 가장 문제로 지적된 것이 부실한 초기대응으로 밝혀지면서 가입자는 물론 일반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고 있습니다. 5월18일 처음 해킹 피해를 인지 하였음에도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에 공식적으로 신고한 시점은 5월20일 이였습니다. 이는 해킹 발생 인지 후 "24시간 내 신고 규정" 위반한 것입니다. 경찰도 해킹관련 수사를 정식 수사로 전환하면서 22명의 사이버전담 수사팀을 꾸리면서 해킹관련 디지털 증거를 빠르게 확보하고, 국내외 공조 체게를 통한 해킹의 경위와 배후를 추적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럼 해킹 규모는? 이번 SKT망 해킹으로공격당한 네트워크 서버는 통상 'HSS'(가입자인증서버)로 불리는 유심 정보 관리서버로 알려졌으며, 합동조사단 1차 조사 결과 유출된 정보는 총 25종으로 밝혀졌습니다. 세부적으로 보면 가입자 전화번호, 가입자식별번호,기본키,사업자인증키 등 유심 복제에 악용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드로 알려졌습니다. 다행히 1차 조사 결과 일단 단말기 고유식별번호(IMEI)는 유출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으며, 유심 보호 서비스에 가입한다는 전제하에 유출된 정보로 유심을 복제해 다른 휴대전화에 꽂아 불법행위를 하는 이른바 ‘심 스와핑’ 가능성은 없다는 게 정부합동조사단의 설명입니다. 하지만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현재 외부로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된 정보만 갖고도 추가 정보 조합을 통해 충분히 개인 식별이 가능할 여지가 높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부합동조사단도 기타 중요 정보가 포함돼 있는 서버들을 조사하고 있기 때문에 정보 유출의 범주를 정확하게 확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금융권에서도 아직까지 부정 인증 등의 특이한 징후는 발견되지 안았다고 하면서도 SKT휴대전화 인증을 중단하는 등 이상금융거래를 집중 모니터링 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 중이라고 합니다. SKT 가입자 대규모 이탈과 법정 소송도 진행 SKT는 해킹피해최소화를 위해 그동안 유료였던 '유심보호서비스'를 무료로 제공중이며 또한 유심 교체를 위한 재고 확보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칩 교체없이 동이한 효과를 낼 수 있는 유심포멧서비스도 곧 내놓을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번 해킹 사태에 불안감을 느낀 이용자들이 대거 다른 통신사로 이동을 하면서 KT와 LG유플러스는 보조금을 늘이는 등 가입자 유치를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치고 있습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법조계와 시민단체에서도 집단 소송과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SKT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자발적, 원고료로 응원해 주세요! *예금주 : 대한기자신문 계좌 : 우체국 110-0053-16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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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9
  • 전남 목포시 추모공원 ‘승화원’ 민간운영 전문성 기대
    목포시 승화원(화장장)/사진=독자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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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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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기자신문] 기도는 하는 게 아니라 듣는 것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우리는 기도를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말을 꺼내고, 소원을 나열하고, 간절함을 쏟아내는 행위. 그래서 기도는 언제나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질문이 생긴다.기도는 정말 말하는 것일까.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어떤 과정이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대화할 때, 말하는 것만으로는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상대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대화는 독백에 불과하다. 기도도 마찬가지다.끊임없이 말하기만 하는 기도는, 어쩌면 하늘을 향한 독백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기도는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말을 멈춘 이후에 시작된다. 기도를 마치고 난 뒤의 침묵.그 짧은 고요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듣는 상태’에 들어간다.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내려놓고,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미세한 울림을 감지하는 시간. 그것이 바로 기도의 본질에 가깝다. 많은 이들이 기도를 통해 답을 얻고 싶어 한다.하지만 답은 늘 말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답은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에 떠 오른다. 기도는 신에게 설득을 시도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정리하는 시간이다. 혼란스러운 감정들을 내려놓고,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어떤 삶을 선택해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도는 ‘요청’이 아니라 ‘경청’이다. 기도를 오래 한 사람일수록 말이 줄어든다.짧아진 문장, 단순해진 표현, 그리고 길어진 침묵. 그들은 더 이상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대신 더 깊이 듣는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이 말하려 한다.설명하고, 설득하고, 요구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는 말이 아니라 ‘들음’이 방향을 결정한다. 기도 역시 그렇다. 진짜로 들어야 할 것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거창한 음성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었지만 소음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기도는 하늘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말을 줄이고, 마음을 비우고, 조용히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기도는 시작된다. 그래서 기도는 하는 것이 아니라,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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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0
  • [대한기자신문] 침묵하는 다수, 과장되는 다수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최근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반복된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를 지지하는 것 같다”는 응답이 실제 통계 수치보다 훨씬 높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컨대 특정 정책의 찬성률이 48%에 그쳤음에도, 응답자의 60% 이상이 “주변은 거의 다 찬성 분위기”라고 답하는 식이다. 실제 다수보다 ‘체감 다수’가 더 크게 인식되는 이 간극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 배경에는 이른바 동조화 현상(conformity) 이 자리하고 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소속 집단에서 배제되지 않기 위해, 또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다수의 의견에 맞추려는 심리가 작동한다. 문제는 그 ‘다수’가 실제 다수인지, 아니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들어진 다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1. 여론은 숫자인가, 분위기인가? 한국갤럽이나 리얼미터 같은 국내 여론조사 기관들의 발표를 보면, 특정 사안에 대해 찬반이 팽팽하게 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포털 댓글, SNS 알고리즘, 유튜브 추천 영상 속에서는 한쪽 의견이 압도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목소리가 반복 노출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사회적 표준’으로 오인한다. 실제 수치와 상관없이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는 인식이 형성된다. 이를 설명하는 대표적 이론이 독일 사회학자 엘리자베트 노엘레-노이만의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이 소수라고 느낄수록 침묵하게 되고, 그 침묵은 다시 다수의 목소리를 더욱 크게 보이게 만든다. 최근 선거 국면에서도 유사한 장면은 반복된다. 선거 직전 발표되는 지지율 격차가 오차범위 내임에도, 일부 지지층은 “이미 승부는 끝났다”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러면 부동층 일부는 ‘이길 쪽에 서는 편이 낫다’는 심리, 즉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에 따라 이동한다. 여론은 숫자 이전에 ‘기류’로 작동하는 셈이다. 2. 동조는 안정이지만, 과도한 동조는 위험이다 동조화 자체가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사회 질서와 공동체 유지에는 일정한 규범 공유가 필요하다. 문제는 비판적 사고가 사라질 때다. 기업 조직에서도 상사의 의견에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면, 전략적 오류가 반복된다. 이를 ‘집단사고(groupthink)’라 부른다. 정치 영역에서는 더 치명적이다. 정책의 장단점에 대한 충분한 토론 없이, “국민 여론이 그렇다”는 모호한 근거가 의사결정의 명분으로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지역, 세대, 이념적 정체성이 강하게 형성된 환경에서는 동조 압력이 더 크게 작동한다.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곧 정체성의 일부가 되면, 이견은 곧 배신이나 적대의 표시로 해석되기 쉽다. 그 결과, 온건한 다수는 침묵하고 강한 소수만이 남는다. 3. 숫자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태도’ 여론조사는 민주주의의 체온계다. 그러나 체온계는 온도를 재는 도구일 뿐, 온도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여론을 읽는 방식이다. 첫째, ‘과연 이것이 전체 의견을 반영하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표본 수, 조사 방식, 응답률, 오차범위를 살펴보는 시민적 감수성이 요구된다. 둘째, 온라인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정보가 전체 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셋째, 침묵을 선택하는 다수의 존재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동조화 현상은 인간 본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을 힘을 갖게 된다. 민주주의는 소리 큰 사람의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시민의 것이다. 다수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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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05
  • [대한기자신문] 소환되는 김동길 박사 어록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힘 있는 자가 수용하지 않으면 아무 쓸모 없다. 따라서 힘없는 사람 주장은 자기 독백에 불과한 것이다.” 고(故) 김동길 박사가 과거 한 시사 토론 프로그램에서 남긴 이 말은, 오늘의 정치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시 소환되고 있다. 그는 권력의 본질을 간명하게 짚었다. 힘없는 자의 외침은, 힘 있는 자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공론이 되지 못한다는 것. 동시에 그것은 권력을 쥔 쪽에 대한 준엄한 경고였다. 수용하지 않는 권력은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의미에서다. 보수 진영의 위기는 전직 대통령 윤석열의 이해하기 어려운 계엄령 선포에서 시작됐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계엄은 극단적 선택이다. 그 결정이 남긴 정치적 후폭풍은 단순한 정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보수 정치 전반의 신뢰를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이어진 혼란과 지지 기반의 이탈은 어쩌면 충분히 예견 가능한 수순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국민의힘 당권파 일각에서는 여전히 ‘윤 어게인’을 외치며 책임을 외부로 돌리는 듯한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여당 탓, 언론 탓, 찬탄 탓. 그러나 정작 성찰과 쇄신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김동길 박사의 어록을 빌리자면, 국민의 비판을 ‘힘없는 사람의 자기 이야기’로 흘려듣는 순간, 정치의 생명선은 끊어지기 시작한다. 현재 국회 절대 다수 의석을 확보한 민주당과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이재명 대통령에 맞서기 위해서는 야권의 전략적 결집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내부 유력 주자였던 한동훈, 오세훈 등을 사실상 배제하거나 거리 두기를 하면서 6월 3일 지방선거 승리를 자신하는 계산은 시대착오적 낙관에 가깝다. 외연 확장 대신 진영의 울타리만 높이는 전략으로는 중도층의 마음을 되돌리기 어렵다. 더 가관인 것은 일부 영남 지역 중진 의원들의 태도다. 당의 위기 앞에서 당권파를 향한 쓴소리와 책임 있는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차기 공천을 의식한 듯한 언행으로 일관하는 모습은 국민 눈높이와 거리가 멀다. 권력 내부의 ‘침묵’은 때로 노골적인 동조보다 더 큰 책임을 남긴다. 공천을 염두에 둔 계산 정치가 당의 미래보다 앞설 때, 그 정당은 활력을 잃는다. 정치는 힘의 행사이기 전에 책임의 수용이어야 한다. 김동길 박사의 말은 단지 냉소적 현실 묘사가 아니다. 힘 있는 자가 스스로를 낮추고 비판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공적 권위가 완성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수용 없는 권력은 오만으로 흐르고, 오만은 몰락으로 이어진다. 지금 소환되는 김동길 박사의 어록은 과거의 회고가 아니다. 오늘의 정치가 여전히 그 경고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힘 있는 자가 듣지 않으면 민심은 다른 통로를 찾는다. 그리고 그 민심은 언젠가 또 다른 힘이 되어 정치의 지형을 바꾼다. 국민의힘 당권파를 향한 경고 다름 아니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수용하는 힘만이 오래간다. 그 단순한 진리를 되새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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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28
  • [대한기자신문] 거꾸로 보는 세상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우리는 흔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믿는다.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으로 축적한 판단이 곧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조금만 멈춰 보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는 사실 “현실 그 자체”라기보다 오랜 시간 학습된 해석의 결과일 때가 많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일정한 방향의 삶을 배운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성장은 위로 향하며, 속도는 경쟁력이고, 더 많은 선택지는 곧 더 큰 안전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인식은 너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의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벗어난 시도는 비효율적이거나 위험한 선택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익숙한 해석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치열하게 올라온 자리에서 예상하지 못한 공허를 느끼기도 하고, 남들보다 늦게 걷는 길에서 오히려 안정과 만족을 발견하기도 한다. 옳다고 믿었던 판단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장면을 마주할 때도 있다.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질문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면?” “혹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는 없을까?” ‘거꾸로 본다’는 것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거나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태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해의 범위를 넓히는 인식의 전환에 가깝다. 같은 풍경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때 보이지 않던 의미가 드러나듯, 사고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우리가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실제로 많은 변화는 이런 관점의 전환에서 시작되었다. 실패를 끝이 아니라 학습으로 바라보는 태도, 경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성장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시선, 속도를 늦추는 것이 뒤처짐이 아니라 균형을 찾는 선택이라는 깨달음이 그렇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거창한 혁신이 아니라, 익숙함을 잠시 내려놓는 작은 질문에서 출발한다. 현대 사회는 정답을 빠르게 찾는 능력을 강조하지만, 때로는 질문을 바꾸는 일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기준을 잠시 뒤집어 보는 순간, 삶의 방향뿐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선택과 속도를 인정하는 사회는 바로 이런 시선의 확장에서 가능해진다. 결국 ‘거꾸로 보는 세상’이란 세상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익숙함 속에 숨은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답을 배우며 살아왔다. 이제는 질문의 방향을 바꿀 때다. 때로는 세상을 바로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잠시 거꾸로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위 내용에 관해 조금 더 관심있는 분은 필자가 집필한 “거꾸로 보는 세상”에세이를 e-Book으로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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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1
  • [대한기자신문]신 믿는 종교 vs 진리 믿는 종교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인류의 사유는 언제나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세계를 이해하기 이전에 인간은 먼저 세계 앞에 서서 자신의 불안을 자각했고, 그 불안을 견디기 위해 기대어 설 무엇인가를 찾았다. 종교는 바로 그 선택의 기록이다. 그리고 그 기록은 크게 두 갈래의 방향을 보여준다. 신을 믿는 길과 진리를 믿는 길이다. 이 대비는 단순한 분류가 아니다. 믿음의 대상이 인격적 존재인지, 아니면 이해해야 할 원리인지에 따라 인간의 태도, 윤리, 삶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신과 진리는 서로 다른 언어로 인간을 부르고,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의식을 조직해 왔다. 첫째, 신을 믿는 종교: 응답하는 인간 신을 믿는 종교에서 중심은 인격적 존재다. 신은 말하고, 명령하고, 약속하며, 인간의 삶에 개입한다. 이 구조에서 인간은 질문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응답하는 존재다. 기도는 대화이며, 계율은 관계의 규칙이다. 여기서 믿음은 이해 이전의 신뢰다. 인간은 세계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채, 그 의미를 보증하는 타자에게 자신을 맡긴다. 고통의 이유를 알지 못해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 믿고 견딘다. 이 믿음은 인간에게 위로와 연대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전통은 인간의 유한성과 죄의식을 전면에 드러냈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할 수 없기에,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구원을 모색한다. ‘예수’가 보여준 사랑과 희생의 서사는 바로 이 관계적 구조의 정점에 놓인다. 둘째, 진리를 믿는 종교: 인식하는 인간 반면 진리를 믿는 종교에서 중심은 원리와 깨달음이다. 여기에는 반드시 인격적 신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법, 길, 진리, 혹은 실상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인간은 보호받는 존재라기보다 깨어나야 할 존재다. 이 구조에서 믿음은 맹목이 아니라 확신을 향한 과정이다. 의심은 배제되지 않고, 오히려 수행의 일부로 받아들여진다. 질문은 죄가 아니라 도구이며, 깨달음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내부에서 성취되는 통찰이다. 인간은 세계의 고통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기보다, 무지와 집착의 결과로 이해한다. 따라서 구원은 용서가 아니라 인식의 전환이다. ‘붓다’의 가르침은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고통의 원인과 소멸의 길을 탐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두 믿음의 차이, 두 인간의 초상 신을 믿는 종교에서 인간은 관계 속의 존재다. 그는 부름을 받고, 응답하며, 사랑과 복종 사이에서 자신의 삶을 정렬한다. 진리를 믿는 종교에서 인간은 인식의 주체다. 그는 무지를 자각하고, 사유와 수행을 통해 세계를 통과한다. 하나는 맡김을 통해 삶을 견디고, 다른 하나는 이해를 통해 삶을 넘어선다. 이 차이는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다. 어떤 문화와 시대는 관계의 언어를 필요로 했고, 또 다른 곳에서는 인식의 언어가 더 절실했다. 그 선택의 배경에는 언제나 인간의 불안, 한계, 그리고 가능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넷째, 대립이 아닌 지형도 “신 믿는 종교 vs 진리 믿는 종교”라는 구도는 대립을 부추기기 위한 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유의 지형도다. 이 지형 위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해석해 왔는지, 어떤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확보해 왔는지를 읽을 수 있다. 종교는 하나의 답이라기보다, 질문을 지속하게 만드는 사유의 공간이다. 신과 진리 사이에서 인간은 흔들리고, 선택하며, 다시 질문해 왔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서 인간의 의식은 확장되어 왔다. 따라서 결론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대신 질문을 다시 꺼내 놓자. •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선택하는 일인가? • 그리고 그 선택은 인간을 어디로 이끄는가? 신과 진리라는 두 이름 아래, 인간이 걸어온 사유의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도 그 길 위를 걷고 있다. ☞ 위 내용에 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알고 싶은 분은 필자가 집필한 “신 믿는 종교 vs 진리 믿는 종교”에세이를 e-Book으로 만나 볼 수 있음을 참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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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8
  • [대한기자신문] 제명된 한동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국민의힘 지도부가 한동훈 전 대표에 대한 제명 결정을 최종 확정했다는 소식은 한국 보수정치의 분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내부 ‘당원 게시판 논란’을 둘러싼 갈등은 결국 최고 수위 징계인 제명으로 이어졌고, 이는 국민의힘의 내홍을 극대화했다. 한 전 대표는 제명 직후 기자회견에서 “제명해도 나의 정치적 열망과 좋은 정치를 향한 의지는 꺾이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복귀 의지와 정치적 포부를 숨기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단순한 정치적 과장이나 발언이 아니다. 그는 이미 정치적 위기를 돌파의 기회로 삼으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 정치적 분열을 넘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한동훈 전 대표가 가장 먼저 고민해야 할 것은 자신만의 ‘정치적 정체성’과 방향이다. 기존 국민의힘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지금, 그는 단순히 기존 지지층을 결집하는 것 이상의 전략을 고민해야 한다. 이는 두 가지 방향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첫째, 당내 복귀와 재통합의 길이다. 단순히 복귀 의지를 밝히는 것에서 나아가, 국민의힘 내의 다양한 세력과의 진정성 있는 대화와 정책적 조율이 필요하다. 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조직력과 결속력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한 전 대표가 무조건적인 대립만을 고집한다면 그의 정치적 고립은 더욱 심화될 수 있다. 둘째, 만약 당내 구조적 한계가 극복 불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새로운 정치 플랫폼을 모색할 필요도 있다. 이는 단순한 신당 창당이라기보다는 정책 연대와 가치 중심의 정치 연합을 형성하는 것이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보수 진영의 위기와 분열은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문제이므로, 그 틈새를 메우는 정치적 비전 제시는 오히려 새로운 지지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 공론장의 역할과 리스크를 재정립해야 한다 이번 제명 사태의 핵심 쟁점은 ‘당원게시판 논란’이라는 다소 사소해 보일 수 있는 문제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이는 단지 한 개인의 실수나 논란을 넘어 디지털 공론장과 정치적 책임의 문제로 확대됐다. 한 전 대표가 이 문제를 단순히 방어 논리로만 접근한다면 향후 정치적 신뢰를 회복하기 어렵다. 그는 공개적으로 “국민과 함께 민주주의를 지키겠다”고 했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한 구호가 아닌 책임과 절제의 정치적 실천을 요구한다. 따라서 공론장의 책임, 정치적 리더십의 한계, 정보의 투명성 등 이번 사태가 던진 질문에 대해 성찰적인 답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 시대적 흐름을 읽는 전략적 선택이 필요하다 지금 한국 정치는 극심한 분열과 양극화를 겪고 있다. 정당 내부의 갈등은 물론, 사회 전체의 정치적 피로감이 누적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동훈 전 대표가 주목할 만한 것은 정책과 담론 중심의 리더십 회복이다. 단순한 정치적 감정싸움이나 인물 중심의 논쟁을 넘어서, 국민이 직면한 현실 문제 - 경제, 사회안전망, 공정 경쟁 - 에 실질적 해결책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스토리텔링과 공감 능력이 결합되어야 한다. 그는 이미 법조인 출신으로 정책적 전문성과 강단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정책과 가치 중심의 소통이 전략적 자원이 되어야 한다. ■ 마지막으로 - 역사적 비판과 성찰 한동훈 전 대표의 제명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몰락사나 복귀전이 아니다. 이는 한국 보수정당의 정체성 위기와 정치문화의 성찰을 촉발하는 사건이다. 그의 정치적 선택은 보수 진영 전체의 미래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갈등과 분열은 이미 구조적 문제로 드러났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재구성할 것인가가 향후 정치 지형을 결정할 것이다. 한동훈 전 대표가 선택해야 할 길은 결국 정책적 책임, 정치적 화해, 그리고 미래 비전 제시로 나아가는 길이다. 단지 당복을 다시 입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 흐름과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는 새로운 정치적 실험이 필요하다. 그가 이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의 위기는 그 자신의 정치적 유산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과연 한동훈 전 대표는 어떤 길을 선택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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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대한기자신문] 노자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2,500여 년 전의 사상가 ‘노자’는 정반대의 길을 제시했다. 그는 더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덜어내라고 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날마다 배움은 더해지지만, 도를 따르는 삶은 날마다 덜어진다(爲學日益 爲道日損)”고 말한다. 지식과 기술은 쌓을수록 늘어나지만, 삶의 본질에 다가갈수록 불필요한 것을 내려놓게 된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면, 성과를 내는 능력과 잘 사는 능력은 다를 수 있다는 경고다. 우리는 흔히 통제하려 든다. 계획을 촘촘히 세우고, 결과를 예측하고, 변수를 제거하려 애쓴다. 하지만 노자는 “억지로 하지 않음으로써 이루지 못함이 없다(無爲而無不爲)”고 말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선택, 과도한 개입을 줄이는 지혜를 말한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 결국 바다에 이르듯, 삶에도 자연스러운 방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오늘날 조직과 리더십의 문제에서 노자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드러나지 않는 리더, 앞서기보다 뒤에서 받쳐주는 지도자야말로 공동체를 오래 지속시킨다. 노자는 최고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 존재를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이는 권위를 과시하는 리더십보다 신뢰를 축적하는 리더십이 강하다는 메시지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끊임없이 비교하며 스스로를 소진시킨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많이 가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정작 나에게 맞는 속도와 방향을 잃는다. 노자의 가르침은 단순하지만 깊다.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애쓰지 말라는 것이다. 이미 충분한 것을 보지 못한 채 부족함만 확대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삶이 복잡해질수록 해답은 의외로 단순해진다. 더 채우는 대신 덜어내고, 앞서려 하기보다 함께 가고, 소유하려 하기보다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 노자는 이를 ‘약함의 힘’이라 불렀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고, 비어 있음이 가득 참을 가능하게 한다는 역설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는 새로운 기술이나 더 많은 정보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쥐고 있는 것 중 무엇을 내려놓을지 선택하는 용기다. 노자는 오래전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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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4
  • [대한기자신문] 슬로우 퓨처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우리는 오랫동안 ‘빠름’을 진보의 증거로 믿어왔다. 더 빨리 생산하고, 더 신속히 소비하며, 남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는 것이 곧 경쟁력이었다. 기술과 시장은 속도를 기준으로 미래를 설계했고, 개인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가속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 속도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방향은 과연 옳았는가? 속도가 극대화될수록 삶은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관계는 얕아졌고, 일의 의미는 희미해졌으며, 성장은 숫자로만 남았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만족은 줄어들었고, 생산성은 삶의 온기를 잠식했다. 빠르게 도착했지만, 어디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태.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재다. 이 지점에서 등장한 개념이 ‘슬로우 퓨처(Slow Future)’다. 슬로우 퓨처는 단순히 느리게 살자는 감성적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설계하는 기준을 속도에서 방향과 깊이로 옮기자는 선언에 가깝다. 더 빨리 가는 대신, 제대로 가자는 주장이다. 슬로우 퓨처가 말하는 느림은 후퇴가 아니다. 이는 선택의 문제다.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처리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무엇이 중요한지 선별하는 능력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성장의 크기보다 균형의 질을 중시하고, 단기 성과보다 장기 지속성을 우선하는 태도다. 기술 역시 더 빠른 자동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을 보완하고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재정의된다.특히 고령화, 기후 위기, 기술 피로가 동시에 진행되는 지금의 사회에서 슬로우 퓨처는 현실적인 대안이 된다. 속도를 늦춘다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에 책임질 수 있는 속도를 선택하는 일이다. 개인에게는 소진을 줄이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길이며, 조직과 사회에는 지속 가능한 신뢰를 쌓는 방식이다. 미래는 반드시 빨라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멈춰 서서 방향을 확인할 때, 비로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슬로우 퓨처는 속도의 시대 이후를 준비하는 사유의 전환이다. 더 늦게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오래 가기 위해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속이 아니라, 의식적인 감속이다. ☞ 위 내용에 조금 더 관심 있는 분은 필자가 집필한 “슬로우 퓨처”를 e-Book으로 만나보실 수 있음을 참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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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9
  • [대한기자신문] 더 큰 바보 이론
    "나는 비싸게 샀지만, 나보다 더 비싸게 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이 믿음은 투자의 논리가 아니라 기대의 전염이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더 큰 바보 이론(Greater Fool Theory)" 이라 부른다. 자산의 내재 가치와 무관하게, 더 큰 바보가 등장할 것이라는 믿음만으로 거래가 이어지는 현상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이론은 단순하다. 내가 바보가 아닐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나보다 더 바보 같은 누군가가 뒤에 줄을 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 줄이 영원히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첫째, 투자가 아닌 '전가'의 게임 더 큰 바보 이론이 작동하는 시장에서는 질문이 바뀐다. "이 자산은 얼마나 가치 있는가?"가 아니라, "이걸 내가 팔 때, 누가 받아줄 것인가?"가 핵심이 된다. 이 순간부터 투자는 분석이 아니라, 전가의 기술이 된다. 위험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다음 사람에게 넘겨질 뿐이다. 부동산, 주식, 암호화폐, 심지어 한때는 튤립 구근까지 - 역사는 이 이론이 반복적으로 작동해 왔음을 보여준다. 가격이 오르는 동안에는 모두가 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에 남은 사람은 언제나 "생각보다 더 바보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둘째, 왜 사람들은 이 이론에 빠지는가? 더 큰 바보 이론은 인간의 비이성에서만 비롯되지 않는다. 오히려 집단 심리와 불확실성의 시대가 결합할 때 가장 강력해진다. ◈ 공포와 소외감(]FOMO)이다. "나만 빼고 다 버는 것 같다"는 감정은 판단을 마비시킨다. ◈ 권위의 착시다. 유명인, 전문가, 인플루언서의 참여는 합리적 검증을 대신하는 증거처럼 소비된다. ◈ 유동성의 과잉이다. 돈이 넘칠수록, 사람들은 가치를 따지기보다 "지금 사지 않으면 늦는다"는 감정에 반응한다. 이 모든 조건이 갖춰질 때, 더 큰 바보 이론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구조적 현상이 된다. 셋째, 문제는 "누가 바보인가"가 아니다. 더 큰 바보 이론의 위험성은 개인의 어리석음에 있지 않다. 문제는 모두가 동시에 같은 가정을 할 때 발생한다. "아직은 끝이 아니다." "이번에는 다르다." "정부가, 시장이, 기술이 받쳐줄 것이다." 이 믿음이 깨지는 순간, 시장은 갑자기 질문을 바꾼다. "다음 바보는 어디 있는가?" 에서 "출구는 어디 있는가?"로, 그리고 그때는 이미 늦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넷째, 합리적 투자와의 결정적 차이 합리적 투자는 미래의 현금 흐름을 묻는다. 더 큰 바보 이론은 미래의 구매자를 묻는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결과는 극명하다. 전자는 시간이 내 편이 될 수 있지만, 후자는 시간이 흐를수록 적이 된다. 가격이 오를수록 위험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다. 그리고 그 축적된 위험은 항상 마지막에 현실이 된다. 다섯째,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한 문장 더 큰 바보 이론이 작동하는 동안에는 누구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이 끝난 뒤에는 항상 바보가 존재했다는 사실만 또렷이 남는다. 결론적으로, 투자의 본질은 "얼마에 팔 수 있느냐?"가 아니라 "왜 이 가격이 정당한가?"를 끝까지 설명할 수 있는가에 있다. 그 질문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또 누군가의 출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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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1
  • [대한기자신문] 초고령사회, 정말 맞는 것 같다
    초고령사회, 양평, 촌락, 노인, 일상 이동, 교통 시스템, 연금, 돌봄, 지역 상권, 문화시설, 의료비, 65세, 경의중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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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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