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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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경숙 수필가는 인천 거주, 2019년 국보문학 수필로 등단, The 수필 2024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 인천문인협회 한국수필,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원,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회원, 제11회 풀꽃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낭만, 너는 자유다’

머물고 싶은 시선

 

조경숙/ 수필가

 

늘 사람이 경이롭다. 재밌는 스토리텔링을 안겨주는 이들, 어떻게 저런 피조물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그 안에 어떤 풍경이 숨어 있을지 문을 내어 들어가고 싶다. 가을 지하철 정경은 안타깝고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가을 나무처럼 인간의 모습 또한 알록달록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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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 기운 때문인가. 감기가 오려는지. 재채기 몇 번으로 눈에 물이 고였다. 그렁한 눈물 사이로 얼마 남지 않은 나뭇잎이 창에 기댄 채 나오라고 손짓한다. 정독 도서관을 향해 집을 나선다. 이미 마음부터 물들어 있는 탓이려나. 찬란하게 물든 은행잎과 단풍을 꿈꾸니 서울행 전철은 은하철도 999가 되어 신바람을 몰고 온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아다지오 선율도 낙엽의 한 조각이 되어 마음의 켜를 쌓는다. 끝자락이 멀지 않은 계절, 옹골차게 지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지하철에 오른다. 사소한 공간인데 눈에 들어온 현상은 세상의 아이러니를 담은 작은 무대였다. 파스텔톤의 유화라고 해야 할까. 짧게 느껴지는 시간에 마주한 전철 안 두 개의 풍경은 일상의 쌈박한 균열이었다.

 

하나 남아있는 노약자석을 눈여겨보며 지하철에 들어설 때다. 뒤에 서 있던 60대 여자가 어르신이라고 보기엔 민망한 잰걸음으로 나를 밀치며 그곳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녀보다 먼저 느릿한 걸음으로 빈 자석을 향해 가던 여든 줄 할머니는 급히 비켜서야 했다. 잽싸게 자리 차지한 욕심 가득한 몸짓이라니. 단풍이 채 물들기 전에 성급히 떨어진 낙엽처럼 박약해 보였다. 한 차례 숨 쉬는 순간에 일어난 일이건만 빛나는 가을 햇볕마저 그녀의 등 뒤에서는 놀란 듯 어둡게 가라앉는다.

 

즐겨 듣던 음악인데 마음이 그래서인가. 피아노가 모데라토로 돌아서니 소음처럼 시끌하다. 씁쓸한 목울대가 넘어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이 음악 때문인지, 앉자마자 핸드폰을 켜 든 여자 때문인지.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을 빼며 다른 칸으로 자리를 옮기려 할 때였다. 옆에 서 있던 노신사의 서리 같은 예리한 음성이 앉아 있는 아주머니를 꿰뚫는다. “빠른 걸음으로 자리 차지하는 것을 보니 아픈 사람 같아 보이진 않는데 웬만하면 어르신께 자리 좀 양보하시죠일순 사람들이 증발한 듯 정적이 깊게 깔린다. 불편한 시선을 참지 않고 남들이 꺼리는, 할 말 하는 어르신이다.

 

신사의 포스가 남달랐다. 카키색 잠바 주머니에 듬쑥 손을 넣고 두 다리로 굳게 딛어 몸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은 과하게 당당하였다. 황망한 얼굴로 일어선 아주머니는 단풍잎처럼 붉게 물든 얼굴을 푹 숙인다. 아무 말 없이 다른 칸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은 제철 잃은 철새 같아 어딘가 애처로워 보였다. 뜻 모를 한숨이 나온다. 삶은 가끔 이렇게 거칠고 쓸쓸한 풍경을 여과 없이 드러내니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마침, 지하에서 나온 전철은 높은 명도의 가을빛을 담뿍 싣는다. 할머니부터 환하게 물들이는 넉넉한 햇살에 편안과 안녕은 이어진다.

 

황소 싸움에 개구리 잡힌다고 했던가. 그녀의 움직임에 밀려 옆 일반석, 학생들이 앉아 있는 앞에 서게 되었다. 무릎에 놓인 소녀들의 가방을 보면 친구들과 학원을 마치고 어딘가 즐거운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조용해진 실내에 따스한 빛을 따라 창을 쳐다보다 앞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곁눈질로 보던 소녀가 친구에게 귓속말하고 난 후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순간 자리 양보할 만큼 늙어 보이는가 싶어 서운한 마음에 손사래 치며 사양하였다. 소녀는 초승달 눈웃음으로 금방 내린다고, 친구에게 손 흔들며 출구 쪽으로 갔다. 좀 전에 일어났던 묵직한 마음이 있었기에 풋풋한 소녀들에게 고맙다는 미소를 보낸다.

 

몇 정거장 지났다. 이규석 시집, <풀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 좋다>의 시에 몰두하느라 책에 코를 박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빛 아닌 빛이 뿌리칠 수 없이 밀려왔어라는 구절이 방금 마주한 풍경을 떠올리게 해물색없이 옆을 본다. 두 소녀가 내릴 준비하는지 가방을 들며 일어난다. 그런데 웬걸. 먼저 내린 줄 알았던 소녀가 환하게 웃으며 저쪽 객실 끝에서 슬금슬금 친구 곁으로 합류하는 것이 아닌가. ‘어라짧은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어쩌면 나를 배려하느라먼저 내리는 척했던 것은 아닌지. ‘, 이 아이가 시가 되겠구나.’ 소녀들이 가을빛보다 눈부시게 밀려온다. 뿌리칠 수 없이 다가온 풀꽃 향기의 친절한 사려 깊음이 아니겠는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가슴 뛰는 감동을 만나기 위한 여정이지 싶다. 세월의 무게가 늘 지혜를 담보하지 않으며 어린 가슴에도 고귀한 향기가 깃들 수 있음을 지하철 안 짧은 여정에서 깨닫는다.

 

정독 도서관으로 가는 길목을 걷고 있다. 어디 나사 하나 뽑혀 허술해진 사람처럼 혼자 실실 웃으며 뒹구는 낙엽을 툭툭 건드린다. 별안간 그린라이트가 반짝, 퍼진 햇발이 눈부셔 머뭇거리다 얼음이 되어 발을 멈춘다. 앞에 걷고 있던 이십 대 커플이 장난치듯 입맞춤하고 별일 없었다는 듯 살랑거리며 걷는 것이 아닌가. 햇살이 그들의 소리에 놀랐는지 해맑게 비켜선다.

 

오늘 나에게 왜 이러는 거야.’ 인생이란 시린 모순이, 혹은 가슴 벅찬 순수가 한데 어우러져 한 편의 고운 수필 같은 삶을 완성하는 것이리라. 머물고 싶은 시선들, 아름다우려무나. 나도 아름다우리니.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피아노 아다지오처럼 지울 수 없는 감동의 선율로 하루를 채우려나 보다.

 

조경숙

인천 거주, 2019년 국보문학 수필로 등단, The 수필 2024 빛나는 수필가 60인 선정, 인천문인협회 한국수필,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원, 정독도서관 다스림서울 회원, 11회 풀꽃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낭만, 너는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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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주말에 읽는 한 편의 수필, 조경숙의 '머물고 싶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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