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들녘을 바라보며
최수연/ 수필가
우리나라 사계절은 거짓을 모른다. 언 흙을 녹여가며 생명을 불어넣는 봄은 인간 세상을 꽃으로 수놓아주고, 여름은 뜨거움을 이겨내는 인내심을 키우게 한다. 가을은 짧으나 화려하다. 나무는 나무대로 대대로 내려오는 고유의 색깔로 물들여 입고 해마다 고운 자태로 나타난다. 찜통더위를 견딘 우리에게 피로를 풀어준다. 그뿐만 아니라 정직하다. 열매와 씨앗을 맺게 하고 단풍 들이는 범위도 평등하여 산과 들, 우리 작은 텃밭도 빠트리지 않으니 고마운 일이다. 오색 물감을 뿌려놓은 뒷동산을 넋 놓고 보다가도 야생화가 무리를 지어 피던 들녘과 논밭이 성글어 가는 변화를 보면 쓸쓸하여 눈길을 멈춘다.
이웃에는 커다란 텃밭에 여러 종류의 푸성귀를 키우는 분이 계신다. 오가며 언제 어떤 씨앗을 파종하는지 보고 나도 씨앗을 골고루 사다 뿌렸다. 떡잎이 나오기까지 기다리는 기간 온갖 상상과 부푼 희망은 하늘에 닿았다. 농지는 작물이 활기차게 자랄 때 생기가 난다. 땅심을 주어 열매 맺게 하고 쓰러지지 않게 한다. 잎을 가진 나무나 채소는 바람이 불 때마다 온몸으로 춤추며 자란다. 내 손녀들이 어렸을 때 재롱 피우는 모양 같다. 외출하고 귀가하는 발길은 그 재롱이 보고 싶어 텃밭으로 먼저 간다.
아침에 못 본 고추나 오이꽃이 낮에 활짝 피어 있으면 저절로 감탄사가 쏟아진다. 몇 개나 달릴까, 사진을 찍고 고추가 익으면 오이를 넣고 열무김치를 담글까. 상추도 사다 먹는 것보다 맛있겠지. 아파트에 사는 친구에게 자랑하리라. 참외나 호박이 달리려면 멀었는데 군침이 돌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름을 짓고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리. 가뭄이 길면 말라죽을까 봐 수돗물을 길어다 주고, 비가 쏟아지면 떠내려갈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여름을 보냈다.
가을은 아침저녁 찬바람을 데리고 온다. 우리에게 겨울 준비를 서두르라는 전갈이다. 황금물결로 파도치는 논에는 기계 소리로 가득 찬다. 농기계 발전은 어디까지 가려나. 낫도 지게도 필요 없다. 소가 끌던 마차도 사라졌다. 탈곡하는 장비가 논까지 들어가서 베고 털어 알곡만 싣고 가버리고 벼포기만 남겼다. 씨뿌리고 모종을 심고 언제 싹이 나올까. 기다림으로 설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추위가 찾아왔다. 화단을 눈부시게 장식했던 국화도 불청객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우리도 심어 놓은 가짓수가 여러 종류라 입동 전후에는 갈무리하느라 바빴다. 고구마 여남은 개, 못생긴 가지 너더댓 개. 붉은 고추, 파란 고추 등등 올망졸망한 그릇이 뜰에 가득하다. 텃밭을 집안으로 옮겨놓은 듯하다. 지난해 텃밭은 식재료가 필요할 때 친정엄마처럼 한 아름씩 안겨주었는데 올해는 달랐다. 비가 자주 내렸고 살인적인 더위에 얼마 안 되는 채소는 헐떡이다가 시들거나 녹아버렸다. 열매도 병들어 성한 게 없었다. 그 속에서 상추 한 줌, 참외, 가지, 고구마 등은 열 개 정도 맛보았다. 내 성의에 보답해 준 것이 감사했다. 악천후 기후변화에서 얻은 수확물이라 적은 양도 먹기가 아깝다.
적으나 많으나 이런 결실이 뿌듯하여 농부들은 땀 흘리며 참아냈으리라. 짓는다는 건 쉬운 게 하나도 없다. 글짓기와 밥 짓기가 가장 까다로운 줄 알고 불평했는데, 시골에 와서 살아보니 아니었다. 글짓기 밥 짓기는 날씨와는 무관하고 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은가. 아직은 풋내기 농사꾼이라 시행착오에서 벗어나지 못해 채소밭이 볼품없어도 시골 생활에서 보람을 느낀다. 한동안은 시장에 안 가도 되겠다. 이 정도를 가지고도 마음이 풍요롭다.
된서리가 내린 다음 날 들판 벼포기에는 서릿발이 별처럼 꽂혔다. 자연은 겨울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저런 식으로 알린다. 바람 한 줄기, 햇볕 한 조각도 알뜰하게 챙겨 열매 맺게 해준 밭들은 깊은숨을 고르듯 침묵에 들었다. 우리 텃밭 풍경도 다르지 않다. 먹을 만한 것만 거둬들이고 못난이 열매는 놔뒀더니 하룻밤 사이에 색깔도 변하고 축 늘어졌다. 늦게 태어나서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주인에게 선택받지 못한 일그러진 모습이 안됐다. 특출해야만 출세하는 인간 세상의 축소판 같다.
봄부터 키워낸 채소와 곡식을 남김없이 돌려주고 허허롭게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빈 전답. 훌륭하게 자식을 길러내고 잠시 허리 펴는 부모 모습이다. 다가가면 모두 받아주는 너른 품을 가졌다. 휴식과 전환의 시간을 갖는 자연을 보며 나도 한해를 돌아본다.
▼최수연
1998년 <한국수필> 등단. 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동국문인회 회원. 올해의 수필작가상 수상. 저서 <<바람의 집>> 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