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자신문 김지윤한중문화칼럼니스트] 생성형 인공지능(AI)이 화폭을 채우고 시를 쓰며, 심지어 복잡한 설계도마저 순식간에 출력해내는 시대다.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창의성’마저 거대 언어 모델의 연산 아래 놓이게 된 오늘날,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물질인 ‘흙’을 만지는 도예가의 손끝을 다시 주목한다.
차디찬 매끄러움으로 무장한 디지털 문명의 대척점에서, 투박하고 축축한 흙을 매만지는 행위는 단순한 취미나 복고적 향수를 넘어선다. 그것은 기술 전체주의 시대에 상실해가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필사적인 저항이자, 존재의 근원을 회복하려는 몸짓이다.
하이데거의 경고: ‘몰아세움’의 기술과 도자의 ‘포이에시스’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현대 기술의 본질을 ‘게슈텔(Gestell, 몰아세움)’이라 정의했다. 현대 기술은 자연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주문 대기 중인 부품(Bestand)’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AI 역시 마찬가지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예술적 데이터는 AI의 학습을 위한 재료로 몰아세워지고, 그 결과물은 목적 지향적인 효율성에 함몰된다.

그러나 도자공예는 기술의 이러한 ‘몰아세움’에 순응하지 않는다. 도예가가 물레 앞에 앉아 흙을 대면할 때, 흙은 결코 통제 가능한 부품이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습도와 점력, 그리고 예기치 못한 불순물을 품은 ‘타자(Other)’다. 여기서 도예가의 작업은 하이데거가 강조한 ‘포이에시스(Poiesis)’, 즉 ‘탈은폐’의 과정이 된다. 작가는 흙을 억지로 굴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흙이 가진 잠재적 형태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가마 안에서 일어나는 불의 변화 역시 인간의 계산 밖의 영역이다. 이 불확실성과 비효율성 속에서 탄생한 도자기는, 모든 것이 예측 가능한 AI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사물의 사물성’을 일깨운다. 도자기는 단순히 ‘쓰이는 물건’이 아니라, 하늘과 땅, 인간과 신성이 만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리처드 세넷의 ‘숙련’: 손과 머리의 분절을 넘어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은 그의 저서 《장인(The Craftsman)》에서 현대 사회의 비극을 ‘손과 머리의 분절’에서 찾았다. 설계하는 지능과 실행하는 신체가 분리될 때, 노동은 소외되고 인간의 존엄성은 훼손된다.
AI 시대는 이러한 분절이 극단에 달한 시기다. 프롬프트를 입력하는 ‘머리’만 남고, 물질과 씨름하는 ‘손’은 소거된다.
세넷의 관점에서 도자공예는 손과 머리의 대화를 복원하는 가장 윤리적인 활동이다. 도예가의 손은 단순히 뇌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가 아니다. 손가락 끝의 감각은 흙의 저항을 읽어내고, 그 피드백은 다시 뇌의 생각을 수정한다.
이러한 ‘물질적 의식’은 가상 세계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실존적 경험이다. 세넷은 “무언가를 잘 해내고자 하는 순수한 욕구”로서의 장인 정신이 인간의 삶에 지속성을 부여한다고 역설했다. 0과 1로 치환된 디지털 결과물은 수정이 용이하고 매끄럽지만, 그 안에는 고통스러운 연마의 시간이 거세되어 있다.
반면, 수천 번의 물레질 끝에 완성된 기물에는 작가의 근육이 기억하는 시간과 숙련의 고통이 아로새겨져 있다. 이것이 바로 복제 불가능한 장인의 아우라다.
불완전함의 미학, 그리고 미래의 공예
도자공예의 중요성은 그것이 ‘불완전함’을 허용한다는 데 있다. AI는 오류를 제거하며 완벽을 향해 수렴하지만, 공예는 때로 ‘실수’와 ‘균열’을 아름다움의 일부로 수용한다.
가마의 온도가 미묘하게 어긋나 생겨난 요변(窯變)이나, 작가의 손자국이 남은 비대칭의 곡선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흔적들이다.
우리는 이제 질문해야 한다. 모든 것이 자동화되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특이점’의 시대에, 인간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그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오래된 예술인 도예에 있다. 흙을 파고, 반죽하고, 불을 지피는 이 고된 노동은 인간이 신체적 존재임을 증명하는 선언이다.
도자공예는 AI가 대체할 수 없는 ‘촉각적 진실’의 영역이다. 그것은 데이터로 환원되지 않는 흙의 냄새, 가마 열기의 무게, 그리고 완성된 기물을 손에 쥐었을 때 전해지는 묵직한 온도다.
이 물리적 접촉이야말로 파편화된 현대인의 감각을 통합하고, 디지털 망상 속에서 부유하는 우리를 다시 대지로 불러내리는 ‘닻’의 역할을 한다.
흙을 만지는 일은 세계를 만지는 일이다
도예가는 물레를 돌리며 단순히 그릇을 빚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빚는다. 인공지능이 세계를 ‘정보’로 파악할 때, 도예가는 세계를 ‘물성’으로 껴안는다. 하이데거가 염원했던 존재의 진리와 세넷이 찬양했던 노동의 긍지가 흙 속에서 만난다.
그러므로 AI 시대에 도자공예가 더욱 융성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피와 살을 가진 존재이며, 도구적 이성을 넘어선 창조적 생명력을 지녔음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흙을 만지는 일은 곧 세계와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며, 차디찬 알고리즘의 틈새에서 따스한 인간의 체온을 지켜내는 숭고한 저항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빠른 프로세서가 아니라, 흙 묻은 투박한 손으로 건네는 찻잔 하나에 담긴 정적과 평온일지도 모른다.
글: 中 허베이미술대학교 조소,공공예술대 교수, 디자인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