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기자신문 송면규 논설위원(박사)]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답을 찾는 훈련을 받아왔다. 문제집에는 반드시 맞혀야 할 답이 있었고, 시험은 그 답에 얼마나 가까이 갔는지를 점수로 환산했다. 부모는 ‘바르게’ 살라고 말했고, 학교는 ‘틀리지 않게’ 선택하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인생에도 하나의 정답이 있을 것이라 믿으며 성장한다.
사회로 나와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성공한 삶의 경로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사회적 지위, 자산의 축적, 무난한 인간관계. 이 목록에서 벗어나는 선택은 종종 ‘리스크’나 ‘실패’로 간주된다. 질문은 단순해진다. 나는 지금 정답의 길 위에 서 있는가.
그러나 삶은 시험지가 아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누군가에게는 완벽해 보이는 길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 막히는 감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높은 목표를 향해 질주할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작은 정원에 물을 주는 평온한 반복 속에서 삶의 리듬을 찾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변화를 통해 성장하고, 또 다른 이는 안정 속에서 깊어진다. 서로 다른 욕망과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답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다.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고통이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 무엇을 가져야 한다는 기준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괴롭힌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정답 인생’에 대한 집착 역시 불필요한 고통의 한 형태일지 모른다. 타인의 기준을 내 삶의 해답으로 오인하는 순간, 삶은 비교와 결핍의 연속이 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말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답이 없다는 사실은 각자의 삶이 실험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패는 오답이 아니라 데이터가 되고, 우회는 탈선이 아니라 탐색이 된다. 남들보다 늦어 보이는 선택도, 돌아가는 길도, 그 사람에게는 최적의 경로일 수 있다.
언론과 사회가 해야 할 역할도 여기에서 새롭게 정의된다. 단 하나의 성공 서사를 확대 재생산하기보다,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중받을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일이다. 성취의 크기보다 만족의 깊이를 묻고, 결과보다 과정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사회. 그럴 때 개인은 비로소 자기 삶의 저자가 될 수 있다.
정답이 없다는 말은 “무책임하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더 성실해지라는 요구다.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며, 필요하다면 다시 써 내려갈 용기를 가지라는 말이다. 인생은 채점자가 없는 시험이 아니라, 매일 수정 가능한 원고다.
정답이 없기에 우리는 불안해한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자유롭다. 남의 답안을 베낄 필요도, 평균에 맞출 이유도 없다.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각자의 문장을 완성해 가면 된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진지하게 사랑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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