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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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년 평사리문학대상 수상작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1) 권대근 '흑화된 사건의 붉은 흔적'

 송명화의 '흑적', 2025년 평사리문학대상 수상작 

 

 

권대근/ 문학평론가

 

수필 <흑적>은 낙동강 하구의 섬 진우도에 얽힌 비극적 역사를 섬세한 작가의 감성과 아장스망 그리고 앙가주망이 만들어낸 걸작이다. 송명화 1959년 태풍 사라호로 인해 전쟁고아 280여 명이 희생된 사건을 현재의 시점에서 재호명한다. 그러나 이 글은 단순한 추모문이나 르포가 아니다. 송명화의 시선은 기억의 재현보다 의미의 생성에 닿아 있다. 그녀는 잊힌 장소의 침묵을 해석하기보다, 그 침묵이 우리 안에서 새롭게 작동하게 만든다. <흑적>을 읽고, 평자는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의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다.”라는 마틴 루터킹의 어록을 소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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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도 사라호 태풍 사건으로 인한 고아들의 수장사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사건이 분명했다. 그들은 죽었어도 그들의 추모는 살아 있어야 옳다. 송명화가 진우도의 비극을 다시 호출하는 것은, 과거의 재현이 아니라 그 기억이 현재적 의미로 다시 솟구치는 사건화의 순간을 기록하는 행위다. 따라서 <흑적>기억의 기록이 아니라 의미의 재생산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전쟁고아란 허물을 막 벗은 어린 게처럼 방호막이 없는 신세다.”라는 언명은 보호를 전제한다. “아무리 전후 혼란기라 하여도 물이 서서 몰려올 때 피해서 달려갈 언덕도 제대로 없는 이곳 말고 아이들을 거둘 자리가 그리 없었던가.”라는 대목은 독자의 상상력을 촉발시키고 그의 애민 정서와 저항사상을 고양시킨다.

 

이 수필의 최대의 압권은 사라노태풍에 희생된 아이들을 흑적에 비유한 것이다. “진우도,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했던 고아들의 섬, 아이들은 없다. 삶의 첫 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책은 덮였다.” ‘책은 덮였다는 표현은 현실적 사태의 종결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덮임이 의미의 생성을 촉발한다. 작가는 진우도 아이들을 씨앗혹은 귀화식물에 비유한다. 여기서 귀화식물은 단순한 생태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이식된 존재들의 운명’, 즉 주체 없는 존재의 조건을 드러내는 들뢰즈적 비인칭 사건이다. 인간의 역사와 식물의 생태가 겹쳐지는 이 비유는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며, 사건의 존재론적 평면을 드러낸다. ‘’, ‘즙액’, ‘흑적같은 감각적 어휘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사건이 언어를 통해 다시 생성되는 표면적 장이다.

 

<흑적>은 철저히 현실에 발 딛고 있으면서도, 단순한 사실 기록을 넘어선다. 서정성과 리얼리즘이 긴장 속에서 공존한다. 낙동강의 지형, 진우도의 역사, 장록의 생태적 디테일은 감각적 리얼리티의 층위를 형성하고, 그 위에 감정의 리듬이 서정적으로 진동한다. “섬의 남쪽 아래에 폐허가 된 진우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슴이 비어버린 허름한 우물이 있고, 생명 없는 건물의 뼈대는 누추한 벽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낡아간다.” 는 대목은 사실과 서정이 결합된 대표적 구절이다. 여기서 공간의 묘사는 다큐적 정확성을 지니면서도, 동시에 비유적 감각이 흐른다. “가슴이 비어버린 우물”, “건물의 뼈대”, “바람에 몸을 맡기는 그림자등은 사실적 서술을 넘어, 죽은 사건의 잔해 위에서 울리는 언어의 서정적 진동이다.

 

또한 송명화의 문체는 일관된 정동적 서술을 통해 수필이 지닌 감각적 깊이를 한껏 확장한다. <흑적>은 개인적 추모의 서정을 넘어, 사회적 기억의 복원을 수행하는 윤리적 저항의 문학이다. 송명화의 수필은 과거의 고통을 단순히 회상하거나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은 망각의 층위를 더듬으며, 지워진 존재들의 흔적을 언어의 결로 복원하는 수행적 글쓰기다. 작가는 잊힌 이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면서도, 그 부재의 자리를 언어의 떨림으로 드러낸다. “아무리 전후 혼란기라 하여도 물이 서서 몰려올 때 피해서 달려갈 언덕도 제대로 없는 이곳 말고 아이들을 거둘 자리가 그리 없었던가.”라는 문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윤리적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무책임을 향한 냉정한 도덕적 심판의 언어이며, 동시에 수필이 감정의 진술이 아닌 사유의 행위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섬, 진우도를 향해 손을 흔든다.”로 글을 맺는다. 이 결말은 단순한 작별의 인사가 아니다. 손을 흔드는 행위는 부재한 존재를 향한 애도의 제스처이자, 동시에 존재론적 호명이다. 송명화는 잊힌 아이들을 과거에 묻지 않고, 현재로 불러낸다. 언어 속에서 그들은 다시 살아 있는 존재로 돌아온다. 이때 수필의 문장은 단순한 기술의 도구가 아니라, 존재를 되살리는 호흡이 된다. ‘흑적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슬프기보다 맑고 단단하다. 그것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를 향한 응답의 언어다. 송명화의 앙가주망은 정치적 구호로서의 참여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결 속에서 실천되는 윤리, 곧 문체의 참여다. 그녀는 수필을 통해 세계를 다시 쓰고, 말해지지 않았던 것들에게 발언의 자리를 부여한다. 이때 수필은 한 개인의 감상이나 회고를 넘어, 언어가 윤리로 진화하는 사건의 현장이 된다.

 

<흑적>은 이처럼 정동의 미학언어의 윤리를 한 몸에 결합시킨 보기 드문 수필이다. “장록이 우거져 해마다 가슴의 울혈을 대신 토해내는 땅, 언제쯤 흑적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에서 느낄 수 있듯이, 송명화의 문체는 부드럽지만 결코 연약하지 않으며, 조용하지만 깊은 저항의 힘을 지닌다. 그것은 세계의 슬픔을 받아들이되, 그 슬픔을 언어로 새롭게 호명함으로써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다시 묻는 문체다. 송명화의 문장은 한 편의 애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윤리의 문체라 하겠다. 그녀의 언어는 사건의 고통을 감각적으로 체험하게 하면서도, 사회적 책임과 기억의 윤리를 독자에게 직접 전달한다. 장록의 흑적색이 손끝에 묻듯, 그녀의 수필은 독자의 마음에 윤리적 자극을 남기며 행위로 이어지는 성찰을 촉발한다.

 

흑화라는 말은 색채적, 상징적으로 어둠, 부정적 성격, 은폐, 고통, 죽음 등을 연상시킨다. 단순히 검게 변했다는 의미를 넘어, 의미가 가려지고, 일반적 인식에서 소외된 상태를 의미한다. “흑화된 사건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거나, 감춰진 채 어두운 의미와 감정을 품고 있는 사건을 의미하기 때문에 진우도 진우원 고아들 희생사건은 사회적 폭력, 역사적 망각, 억압당한 목소리, 슬픔과 분노를 내포한 사건으로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건을 붉은 흔적, 애가, 정동적 울림 같은 이미지로 변환해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 이 수필의 특징이기도 하다. 장록의 붉은 즙이 손끝에서 피어날 때, 그것은 더 이상 자연의 색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 윤리의 탄생이다. 작가는 기억의 형식이 아니라, 의미의 운동으로 사건을 되살린다. 그리하여 <흑적>은 죽은 역사 위에 다시 생명의 언어를 심는 문학적 의례가 된다.

 

작가는 언어의 힘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다시 보이게 함으로써, 문학의 본령, 세계에 대한 증언과 저항을 수행한다. “언제쯤 흑적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라는 마지막 문장은 역설적으로 말한다. 그것은 지워질 수 없는 사건의 존재,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 쓰여야 하는 윤리의 과제를 의미한다. 송명화의 <흑적>은 그 붉은 흔적을 통해, 문학이란 무엇보다 기억의 생명과 윤리의 감각을 되살리는 사건의 예술임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물질만이 기쁨과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나를 있게 한 과거의 끈으로 튼튼한 미래를 창조하려는 창조적이며 포용적 마인드가 중요하다. 그녀는, 날선 인식에 삶의 현장을 담고, 이를 바탕으로 저항적, 윤리적 미학을 실천하며, 실천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그녀의 글은 고통을 증언하는 언어가 아니라, 고통을 품은 언어의 윤리 그 자체라 하겠다.

 

권대근 주요 약력

 

경남 남해 출생 '동양문학' 수필 등단(1988) '문예사조' 문학평론 '경북신문' 문학평론 미주 '중앙일보' 수필 신춘문예 당선 현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번역서 '한국의 명수필', 문학이론서 '문장가로 가는 길' 수필집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28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월강문학상, 여산문학상, 정과정문학상, 부산pen번역문학상 등 수상

 

 

 

송명화의 <흑적>

 

울컥대는 각혈 같다. 내 손에서 짓이겨지는 장록의 열매가 걸쭉한 검은 피를 뚝뚝 흘린다. 누구는 와인을 떠올리고 누구는 공포영화를 떠올리며, 누구는 버리고 싶은 기억을 호출한다. 누가 뭐라든 척박한 땅에 당당히 자리 잡고, 키를 키우고 가지를 쳤다. 저 무시무시한 암적의 열매를 맘껏 매단 장록을 여기서 만난 것은 우연일까. 가슴을 뜯는 아픔을 되짚어 찾아온 어눌한 글쟁이의 마음이 푸닥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낙동강 하구에는 여러 개의 섬이 있다. 가덕도가 그중 으뜸인데 가덕과 다리로 이어진 섬 중의 섬, 눌차도에 와 있다. 하오의 여백과 바다의 들숨과 날숨을 품은 정거마을을 지나고, 갈맷길을 걸었다. 감탄도 평화로움도 낯선 감정인 것은 진우도를 찾아온 길이라서다. 언덕을 오르니 진우도 안내판이 몸을 드러낸다. 그것을 애꾸처럼 만든 장록 가지를 정리하고 엉긴 얼룩을 물휴지로 닦는다. 방금 찍은 낙인처럼 선명한 핏물을 정성껏 닦는 것과 묵념 외에 지금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지근거리에 기다란 섬이 해파리처럼 떠있다. 진우도, 진정으로 돌봄이 필요했던 고아들의 섬, 아이들은 없다. 삶의 첫 장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책은 덮였다.

 

낙동강이 열심히 실어 나른 토사가 섬을 살찌웠는지 섬의 흰 뱃구레가 몇 년 전보다 넓어진 듯하다. 사라호 태풍의 공습이 시작되기 전에 운 좋게 섬을 나섰던 생존자의 딸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진우도를 찾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작가들과 함께 서둘러 이곳을 다녀온 뒤로 이 섬은 자주 내 생각 속에 떠올랐다.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게 찾아드는 무의식의 장에서, 때로는 비바람 몰아치는 큰바람 속에서, 혹은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모래폭풍 속에서, 한번은 갯벌을 뒤덮은 들썩이는 기공들 속에서 인원을 어림할 수 없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뒤엉켜 다녔다. 다시 오리라 하였지만 쉽게 나서지 못하였던 건 그 아픔의 심연을 헤아리기 어려워서다.

 

태풍 사라가 진우도를 들이켰을 때, 이곳에 깃든 전쟁고아 280여 명이 몰살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세상이 정지된 듯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안내판에 간단하게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인명사고가 발생 철수했는데라고 적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진우도가 거대한 판에 눌려서 길게 늘어진 커다란 봉분처럼 보인다. 그날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가공할 만한 태풍의 위력이야 역사에 기록되었지만, 아이들에게 닥친 비극은 제대로 기록되고 제대로 추모되고 있는지. 간단하게 인명사고라 눙쳐놓으니 처음에 나는 한둘인 줄 알았다. 안내판의 감정 없는 글자들이 내 목을 죈다.

 

전쟁고아란 허물을 막 벗은 어린 게처럼 방호막이 없는 신세다. 튼튼한 갑옷이 되어주어야 할 정부가, 어른들이 내어준 장소가 하필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 그것도 강의 퇴적물이 이룬 낮은 모래섬이었단 말이던가. 아무리 전후 혼란기라 하여도 물이 서서 몰려올 때 피해서 달려갈 언덕도 제대로 없는 이곳 말고 아이들을 거둘 자리가 그리 없었던가. 완벽한 전쟁의 피해자지만 왜 전쟁이 일어났는지 왜 자신이 고아가 되었는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미약한 생명들이 밀쳐지고 내쳐지다가 그나마 얻은 거처가 바다 가운데 사상누각인 까닭을 누가 해명할 수 있을까.

 

장록 열매를 따서 꽉 쥐어짠다. 즙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원이름은 미국자리공인데 귀화식물이다. 예전에 이곳 선주가 진우도에 이것이 많이 산다고 일러주었다. 씨앗이 미군의 보급물품에 묻어 진우도에 들어온 것일 터이니 진우원 아이들과 같은 처지였겠다. 대여섯 살짜리부터 있었다는데 피난길에 부모를 놓친 아이도, 폭격 속에 살아남은 아이도 있었을까. 구걸하며 떠돌다 이곳으로 흘러든 아이도 있었겠지. 악몽에 시달리기도, 날마다 먼 바다를 보며 엄마아, 아부지이.” 불러보기도 했으리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단단한 사회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었는데, 비극의 막사에는 작은 비상구조차 없었던 것일까.

 

젊은 날, 매주 가는 고아원에는 유치원에도 가지 못하는 어린 애들이 모여있었다. 인사하는 순간부터 네 발로 가슴에 붙은 아이는 떨어질 줄 몰랐다. 헤어질 때 아이에게 다음을 약속하며 손을 떼어놓는 것이 가장 힘들었는데, 처량하게 응응거리는 아이를 다독이며 나도 눈물 비죽이기 일쑤였다. 세상에 고아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나. 진우원 아이들도 님비현상의 피해자였을까. 앞뒤가 달라 더욱 추운 단어인 님비는 사람들의 수치심을 가린다. 장록도 한때 땅을 산성화시킨다고 유해식물 꼬리표를 달았는데 더 연구해보니 산성화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 때문에 생긴 오해였다고 한다. 무지한 말의 칼춤이 홍수를 이루고 부모 잃은 서러움이 피보다 붉더라도 아이들은 장록처럼 꿋꿋하게 살아낼 수 있지 않았을까. 우우우 갑자기 바람이 운다.

 

섬의 남쪽 아래에 폐허가 된 진우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가슴이 비어버린 허름한 우물이 있고, 생명 없는 건물의 뼈대는 누추한 벽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채 바람에 몸을 맡기고 낡아간다. “얘들아.” 부르면 음울한 공기의 떨림이 공간을 채웠다가 아스라이 사라져가는 적막한 구역이다. 한때는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몸짓과 조잘거림으로 가득 찼을 폐허를 대중없이 바람이 쓰다듬는다. 햇빛에 몸을 말리는 날은 송구스럽고, 비 맞고 선 날은 슬프고, 회색 하늘 아래 종일 어두운 날은 그 그림자에 조사(弔詞)를 얹을 뿐인 것을. 미리 아이들을 지척의 섬이나 육지로 대피시킬 생각은 왜 못하였을까. 비바람이 몰아치고 바닷물이 몸을 높여 쳐들어올 때 모래섬에 갇힌 아이들의 공포를 대신 느끼는지 친구의 입술이 파래 보인다. 아픈 기억을 깁느라 말이 없다.

 

흑적색 장록 열매가 톡톡 터진다. 내 손에 물이 들었다. 얼마나 분했기에 손길만 스쳐도 저절로 분출하는 것일까. 부모들이 저승에서 흘리는 피눈물 같다. 그들은 아비규환의 주인공이 된 어린 자식들을 어찌 지켜보았을까. 한풀이를 제대로 못 한 섬은 퍼런 바닷물에 둘러싸여 앓고 있다. 보라고, 느끼라고, 잊지 말라고, 그리고 전하라고, 장록 즙액이 내게 적색경보를 날리는 것일까. 창백한 손끝에 전율이 일어 메모하는 볼펜이 떨린다.

 

자라지 않는 아이들의 섬, 진우도를 향해 손을 흔든다. 그럴듯한 위령비도 없이 아이들은 어찌 잠들어 있을까. 장록이 우거져 해마다 가슴의 울혈을 대신 토해내는 땅, 언제쯤 흑적의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2025년 평사리문학대상 수상작>

 

송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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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문학평론가, 문학언어치료학박사, 전남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계간 에세이문예로 평론 등단, 수필집 <꽃은 소리내어 웃지 않는다>, <순장소녀>(세종도서), <사랑학개론>, <에세, 햇살 위를 걷다>, <사유한다는 것은>, <나무의 응시, 풀의 주름>, 창작이론서 <본격수필 창작이론과 적용>, 설총문학상, 연암박원문학상, 김만중문학상, 우하박문하문학상, 평사리문학상 대상, 신격호샤롯데문학상 외 다수, 에세이문예 주간(2004년부터~)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회장, 부산교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지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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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1) 권대근 '흑화된 사건의 붉은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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