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카우의 6번 도로 상에서
고수부/수필가
벌써 반세기가 흘렀다. 그러나 그날의 기억은 아직도 내 귀전에 총성처럼 울린다. 1967년 봄 나는 젊은 육군 소위로서 월남전 파병을 지원했다. 전투의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땅을 향한 모험심과 막연한 기대가 나를 사로잡았다. 전쟁터라기보다 남쪽 이국 땅에 대한 호기심이 더 앞섰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부산항에서 출항한 미군 수송선은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처음 타보는 거대한 군함은 눈부신 문명의 상징처럼 보였다. 지하 4층까지 내려가는 장교 침실은 호텔처럼 아늑했고 식탁 위에는 고급 요리가 차려졌다. 전쟁터로 향하는 길이었지만 그 항해의 일주일은 오히려 여행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퀴논항에 닿자마자 현실은 서서히 드러났다. 야자수 숲길을 달리는 군용 트럭 위에서 바람은 남국의 향기를 싣고 왔지만 그 길이 곧 죽음이 도사린 전쟁터임을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맹호사단의 사단사령부에 배속된 나는 공병대대 3소대장으로 임무를 부여받았다. 낯선 땅에서 40명의 병사를 이끌어야 한다는 긴장은 무겁게 어깨를 눌렀으나 다행히 아버지 같은 선임하사가 내 곁에 있었다. 그는 지역 상황과 전투 경험을 세세히 알려주며 초임 소대장을 든든히 세워주었다.
첫 임무는 탈환 지역에 피난민 수용소를 짓는 일이었다. 건설공병 출신답게 손에 익은 일이었고 곧 여러 동의 건물이 완성되었다. 집을 잃고 방황하던 주민들은 눈빛으로 고마움을 전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웃음과 인사가 마음을 이어주었다. 그들과의 따뜻한 교류는 내가 전쟁터에 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게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의 정적을 찢는 총성과 함께 현실이 덮쳐왔다. 고지 위에 주둔한 보병중대가 베트콩의 기습을 받아 한밤중에 참혹하게 무너졌다. 박격포탄이 쏟아지고 180명의 병사 중 2/3가 몰살당했다. 바로 아래 진지에 있던 우리 공병소대는 단 한 발의 포탄도 맞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오랫동안 곱씹었다. 피난민과 노동자들을 멸시하지 않고 함께 웃으며 지냈던 작은 인연이 우리를 살렸는지도 모른다. 전쟁터에서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목숨을 살리는 방패가 되었음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그러나 안도의 숨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밤잠을 설쳤다. 호 속에서 총을 세워두고 세우잠을 자는 날들이 이어졌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마음은 점점 메말라갔다. ‘나는 과연 살아 돌아갈 수 있을까’ 의심이 목을 조여 왔다. 하루하루가 파리 목숨 같았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로부터 며칠 뒤 찾아왔다. 보급차가 식량을 싣고 오던 중 송카우의 6번 도로에서 지뢰를 밟아 전복되었다는 보고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병사들이 타고 있는 유일한 차량이 폭파되었다니 숨이 턱 막혔다. 나는 정신없이 뛰어 현장으로 달려갔다. 땀방울이 뜨거운 햇살 아래 쏟아졌고 달리는 발걸음마다 생사의 기로로 내던져지는 듯했다.
현장에 도착하니 인솔자인 김 병장이 울부짖었다. “소대장님, 저 김대출은 살았습니다!” 그 외침은 살았다는 사실이 기적임을 스스로도 믿지 못해 터져 나온 울음 섞인 외마디였다. 운전병은 논밭에 내던져졌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안타깝게도 한 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트럭은 바퀴를 하늘로 드러낸 채 처참히 뒤집혀 있었다.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지뢰탐지기로 도로를 샅샅이 수색했다. 폭파 구덩이를 메우고 다시 차량을 몰아 왕복 운전을 하며 안전을 확인했다. 그제야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주둔지로 돌아오자 또다시 충격적인 보고가 날아왔다. 내가 다녀온 바로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월남군을 잔뜩 태운 트럭이 또 폭파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달려간 현장은 지옥이었다. 수십 명의 월남군 시신이 도로 양옆에 쓰러져 있었다. 숨이 붙어 있는 이들도 신음만 내뱉을 뿐이었다. 미군 헬리콥터가 내려와 시신을 실어 나르는 광경은 말 그대로 인간의 생명이 풀잎처럼 꺾여 나가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더욱 소름 끼친 것은 그 자리가 바로 내가 낮에 수십 번 밟고 차로도 여러 번 지나갔던 지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불과 몇 시간 뒤에 지뢰가 터졌다. 나야말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셈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전쟁터에서 죽고 사는 것이 결코 인간의 힘으로 좌우되지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뢰탐지기조차 완전하지 못한 곳에서 나를 살리신 것은 전능자의 섭리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신앙이 깊지 못했던 초신자였지만 그때부터 하루하루는 오직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내 안에서 무겁게 울린다. 송카우의 6번 도로 그 길 위에서 나는 죽음과 삶을 동시에 목격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살아남아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만약 그때 전사했다면 오늘 이 글도 나의 삶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경험을 내 수필집에서 몇 번이나 인용한 문구이지만 성경 말씀 안에서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사야서 43장 2절의 말씀이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전쟁터의 밤하늘을 가르던 조명탄, 지뢰가 터져 흩날리던 흙먼지 속에서도 나는 이 말씀을 떠올린다. 인간의 생명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같지만 그 속에서 나를 붙잡아주신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송카우의 6번 도로 위에서 나는 깨달았다. 죽음의 땅에서도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하고 공포 속에서도 믿음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몫은 그때의 기적을 증언하며 오늘을 감사히 살아가는 것임을 알았다.
▼고수부
고려대학교 산림자원학과 졸업(학사), 동국대학원 영어교육과 졸업(석사), 월남 맹호부대 참전(ROTC 3기), 미 육군공병학교 측지과정 수료, 미8군 JUSMAG-K 연락장교, 육군대학 졸업, 국방부 관리정보실(육군중령 예편), 전쟁기념관 학예관 정년퇴임, K․J 스피치 자문위원, 순수문학 등단(2003), 국제펜한국본부 회원이며, 순수문학 우수상, 전쟁문학상, 제20회 순수문학 대상, 제7회 에세이문에문학상, 대통령 표창,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수필집으로 '댓돌 위의 갈색 구두' '진주반지' '아침 한 때의 행복' '손자의 비밀' '아내' '석양에 물든 가을 바다' 'Beautiful Story(아름다운 이야기)' '이 모습 이대로' '추억의 집''길에 선 나무는 웃지 않는다' '어둠을 건너는 빛처럼'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