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흙먼지 속으로
서교분/ 수필가, 시인
인생의 석양 무렵에 서니, 문득 젊은 날의 뜨거운 열정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그 그리움의 갈래를 따라 2010년 3월의 기억을 불러내 본다. 당시 미얀마는 군사정권 아래 총선거를 앞둔 어수선한 정국이었으나, 우리는 종교의 벽을 허물고 오직 아이들에게 맑은 우물을 선물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땅을 밟았다. 한국의 스님 대표들과 여불교 신도들 카토릭 자매들이 동행한, 그야말로 자비와 사랑이 하나 된 장엄한 여정이었다.

사실 나에게 이번 여정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평생을 자식 뒷바라지와 병석의 남편을 지키며 살아온 내게 여유로운 돈이란 단 한 푼도 없었다. 하지만 미얀마 아이들이 흙탕물을 마시며 병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보잘것없는 액수일지 모르나, 내게는 뼈를 깍는 듯한 노력으로 한 푼 두 푼 모아온 생명과도 같은 돈이었다.
나는 본래 맛난 음식을 보거나 가지게 되면, 반드시 소중한 이들과 함께 나누어야만 비로소 직성이 풀리는 조금은 별난 성격을 지녔다. 혼자 누리는 풍요보다 함께 나누는 소박한 밥상이 내 마음을 더 배불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성미가 먼 타국 땅 아이들의 목마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했다. 내 형펀의 넉넉함 때문이 아니라, 나눔을 향한 그 멈출 수 없는 지독한 성격이 나를 미얀마의 붉은 흙먼지 속으로 이끌었다. 나눌수록 내 마음의 빈터가 찰랑거리며 차오르는 그 신비로운 기쁨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성지로 향하는 길은 시작부터 육체적 고행의 연속이었다. 낡은 타이탄 트럭 뒤편에 나무판자를 걸쳐 만든 임시 의자에 일행이 줄지어 앉았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를 때마다 몸은 속수무책으로 좌우로 쏠렸고, 갑자기 쏫아진 비에 낡은 비닐을 뒤집어쓰니 영락없는 짐짝 신세였다. 덜커덩거리는 자체에 몸을 맡긴 채,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지탱하며 그 험한 길을 견뎠다. 브레이크조차 예고 없이 멈쳐서 차가 뒤로 밀리는 아찔한 순간이 반복될 때마다, 일행의 입에서는 낫은 탄식과 간절한 기도가 번갈아 흘러나왔다.
마침내 도착한 사찰에서 유리병 속 찬란한 사리들을 마주하는 순간, 마음의 요동은 인내의 평온함으로 바뀌었다. 유리병 속 사리들은 오랜 세월 인내한 성자의 눈물 같기도 하고, 어두운 밤하늘을 수놓은 영롱한 별빛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앞에서 두 손을 모으며, 내 인생의 고비마다 쏟았던 피눈물도 언젠가는 저토록 아름다운 보석으로 아물 수 있을지 나직히 물었다. 침묵 속에서 전해오는 성자의 가르침을 비우고 낮추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결한 평온이었다. ‘금란’이라는 나의 필명처럼, 인생의 고난을 단단하게 다져낸 뒤에야 비로소 은은한 향기를 낼 수 있다는 진리를 그 작은 유리병에서 다시금 깨달았다.
하산하는 길, 브레이크는 여전히 위태로웠고 길은 더욱 가팔라졌다. 긴장감이 감도는 트럭 안에서 나는 비닐우산을 펼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목청껏 가톨릭 성가 2번을 우렁차게 불렀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속에 그리워 볼 때…”
빗줄기를 뚫고 퍼져 나가는 나의 노래는 미얀마의 산골짝에 메아리쳤다. “주님은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라는 가사가 입술 끝을 떠날 때, 내 눈앞에는 비바람 치는 산길이 아니라 하느님이 빚으신 눈부신 대자연과 그 품안에서 살아가는 가난하고 선한 영혼들이 보였다. 스님들은 묵묵히 그 찬양을 들으며 우리가 무사히 내려가기를 함께 기도해주셨다. 성당과 사찰이 하나되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 순간, 우리는 종교의 도그마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흐르는 선한 의지를 믿고 있었다. 비닐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마치 하늘이 보내는 박수소리처럼 경쾌했다. 그 소리는 마치 하느님이 내 작은 용기에 보내주시는 응원의 박수처럼 들려와, 굽어진 산길의 두려움마저 말끔히 씻어주었다.
우리가 찾아간 초등학교 아이들은 흙탕물을 마시며 위태로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부모의 평균 수명이 고작 50세라는 척박한 땅, 우리를 위해 고사리손을 흔들며 재롱잔치를 벌이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비록 옷은 남루했으나 맑은 눈방울로 웃어주던 그 몸짓은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고귀했다. 아이들의 발등에는 붉은 흙먼지가 가득했다. 신발도 없이 맨발로 뛰노는 그 작은 발들을 보며, 오래전 우리네 가난했던 시절이 겹쳐와 코끝이 찡해졌다.
여유 없는 형편에 모은 돈으로 만든 우물이 마침내 완공되어 맑은 물이 솟구칠 때,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맛난 음식을 이웃과 나누어야 직성이 풀리던 그 별난 성격이, 이제는 목마른 아이들에게 생명수를 나누는 거대한 기쁨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밤샘 뜨개질을 하며 올렸던 그 간절한 기도들이, 이제는 이름 모를 미얀마 아이들의 목마름을 축이는 사랑으로 치유되고 있었다. 흙탕물을 마시며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맑은 우물이었지만, 사실 그 아이들이 내게 준 것은 메마른 내 영혼을 적시는 자비의 단비였다.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를 맞으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함성 속에서, 나는 내가 살아온 88년의 모든 고단함이 한순간에 씻어 내려가는 경이로움을 느꼈다.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에서 휠체어를 밀며, 나 또한 그 의지에 기대어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남을 돕는 일이 곧 나를 돕는 길임을, 낮은 자세로 임할 때 비로소 내면이 더 단단해짐을 깨닫는 여정이었다. 돌아보면 삶이란 결국 나를 비워내고 그 빈자리를 타인의 행복으로 채워주는 과정이 아니든가. 타국의 아이들에게 우물을 파주며 정작 내 마음속 메말랐던 우물이 먼저 채워졌음을 이제야 깨닫는다. 비우면 비울수록 기쁨의 수위가 높아지는 역설적인 진리를, 미얀마의 흙먼지 속에서 다시금 배운 것이다.
흙탕물 속에서 피어난 연꽃 같은 아이들의 미소를 기억하며,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의 우물 물을 망에 거른다. 그 우물 물을 한 그릇이 세상의 목마른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나는 내 이름 ‘교분’처럼 죽는 날까지 사랑의 가르침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다. 여유가 없어서 더 간절했고, 부족했기에 더 뜨거웠던 그 미얀마의 기억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훈장이 되어 영원히 흐를 것이다. 주 하느님이 지우신 모든 세계가 내 나눔을 통해 조금 더 향기로워질 수 있다면, 미수의 나이에도 여전히 우물을 파는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누군가에게 시원한 생명수를 건넬 수 있는 사람, 그것이야말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남길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흔적이 아니랴.
▼ 서교분
시인, 수필가
연세대 미래교육원 수필반 수료
국보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국보문학 옥당문화상 수상
인천여자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경희대 행정대학원 석사
대구미래대학노인대학원 강사 역임
여의도성당 신앙수기 최우수상
여수기행문대상 수상
연세에세이회장 공로상
보건복지부장관상 수상
저서 ‘그것은 고통이 아니고 은총이었습니다’(1989)
‘행복한 여자’(2009)
‘걸어온 길 걸어갈 길’(2014)
‘인연’(2020)
‘창가에 서서’(2023)
‘내 맘의 꽃’(2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