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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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윤정의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9) 김정애 상처의 마모, 그 찬란한 되기의 미학

문윤정의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

 

 

김정애/ 문학평론가

 

수필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은 더블린의 겨울 해변이라는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바다 유리에 투영된 삶의 상처와 회복을 깊이 있게 성찰한 작품이다. 사물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보편적인 삶의 철학으로 확장되는 구조 또한 매우 탄탄하다. 특히 상처가 마모되어 지혜로 화()하는 그 역동적인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존재를 고정된 틀이 아닌 끊임없는 생성으로 파악하는 들뢰즈적 관점으로 이 텍스트를 읽어낼 충분한 근거를 제공한다. 권대근은 들뢰즈 철학을 본격수필 창작이론에 접맥한 최초의 수필학자다. 그의 창의적 역작인 본격수필문학의 이론과 실제를 참고하여 이 작품을 비평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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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병은 본래 액체를 담아야 한다는 기능적 영토에 유폐된 존재였다. 어느 날의 충격이 유리병을 산산이 깨뜨리고, 그와 함께 견고해 보이던 지층을 무너뜨렸다. 그것은 파편화라는 몰락이 아니라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의 개시다. 날카로운 단면은 액체를 담는 대신 바다의 강렬한 파도와 직면하며, 고정된 목적을 잃어버린 채 유목적인 흐름 속에 몸을 던진다. 이 날선 파편에서 공포가 아닌 새로운 존재로의 거듭남을 포착하는 작가의 눈은, 어지러운 만유의 세상에서 독특한 제재와 주제를 건져 올리는 심미안의 예리함을 보여준다. 파괴가 곧 창조적 도약이라는 역설을 문학적으로 선언하는 순간, 독자의 몰입은 한층 깊어진다.

 

바다는 유리를 집어삼키는 심연이 아니라, 무수한 반복을 통해 차이를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이다. 조개껍데기가 생명의 주체가 빠져나간 부재의 흔적이라면, 유리조각은 외부 세계와 부딪히며 깎여나가는 현존의 투쟁이다. 파도는 수만 번 같은 몸짓으로 유리를 밀어 올리지만, 그 반복은 단 한 번도 동일하지 않다. 들뢰즈가 말하는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의 원리처럼, 유리조각은 매 순간 미세하게 깎여나가며 어제의 자신과 결별한다. “모래알 사이에서 자신을 잘 연마해온 작은 조각이라는 표현은 고통의 반복이 어떻게 영혼의 고유한 강도(强度)를 높여가는지를 보여준다. 이 연마의 시간은 상처를 지우는 망각의 시간이 아니라, 상처를 자기 삶의 유일무이한 문양으로 새겨 넣는 생성(Devenir)의 시간이다.

 

바다 유리는 작가와 메리 이모,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슬픔을 잇는 리좀(Rhizome)의 마디가 된다. 메리 이모가 건넨 유리조각은 수직적 교훈이 아니라, 상처 입은 자들끼리 나누는 수평적 마주침의 신호다.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이라는 제목은 이 수필의 핵심을 꿰뚫는다. 우리는 모두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접속되어 흐르는 존재들이다. 더블린의 해변과 한국의 서해안을 흐르는 소주병의 파편은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작가는 유리조각이라는 미미한 사물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접속하고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배치(Agencement)’의 예술을 보여준다.

 

결말에서 인용된 조각가의 비유는 들뢰즈의 자기 생성철학의 정점에 놓인다. 완성을 향한 조각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깎아내며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다. 작가는 유리조각을 보며 자신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는 상처가 없던 과거로 돌아가는 회복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는 상처 입은 자 되기의 완성이다. 불투명해진 유리가 빛을 반사하는 대신 은은하게 머금듯, 작가는 고통을 삶의 배경으로 수용하며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생성을 멈추지 않는다.

 

조개껍데기는 강탈당한 알맹이(상실)에 대한 연민이다. 반면 유리조각은 날카로운 상처가 시간(파도)을 통해 둥글어지는 과정, 곧 성숙의 시간을 그려낸다. 이를 작가는 조각가가 고통을 깎아내어 영혼을 빚는 수련의 과정에 비유했다. 유리조각을 상처, 치유, 시간, 연마, 영혼으로 확장하지만, 한 번도 설명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파도에 쓸리고 모래알에 쓸리어 원래의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듯하다.” 이 문장은 독자에게 인생의 비유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숙련된 작가의 면모가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부서진 것들의 잔해 위에서 어떻게 새로운 삶의 형식이 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서정적 투쟁기이다. 작가는 날카로운 비애를 둥근 지혜로 치환시키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바다에서 자신만의 조각을 빚고 있는 유목민임을 일깨워준다. 상처를 대하는 태도의 품격이 느껴진다. 상처를 미화하지 않고, 치유를 성급히 말하지 않으며, 삶을 견뎌낸 결과물로 보여줌으로써 상처의 마모(磨耗)’라는 근원적인 위로를 독자에게 건네고 있다. 특히 마지막 문장 얼마 동안 조각해야 아름다운 영혼이 될까라는 자문은 독자의 가슴에 긴 여운(강도)을 남기는 훌륭한 마무리다.

 

김정애 주요 약력

 

부산 출생 윤리교육학 석사 문학언어치료학 박사 에세이문예수필 등단(2012), 평론 등단(2013) ()부산수필문학협회 회장 다스림문학동인 회장 ()국제PEN한국본부부산지역위원회 수석부회장 에세이문예 편집1부장 설총문학상 민들레수필문학상 에세이문예문학상 사유와언어문학상 문학발전 유공 기념은장 부산펜문학상 작품상 한국에세이 작품상 부산수필문학 작품상 수필집 내 마음의 엑스레이’, ‘탈춤’, ‘인연’, ‘고슴도치 사랑

 

 

 

문윤정의 <누군가의 심장 한 조각>

 

바람이 거칠게 부는 12월 어느 날, 더블린의 스케리스 해변을 거닐었다. 메리의 이모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서 산책에 나섰다. 하얀색 집이 즐비한 아름다운 마을을 지나 해변에 도착했다. 여름 시즌에는 사람들로 붐비겠지만, 겨울이라 한적했다.

메리는 딸의 친구인데, 더블린에서 메리의 이모집에 머물렀다. 나는 모래사장을 거닐면서 습관처럼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알맹이를 강탈당한 구멍 난 조개껍데기에 연민의 마음을 얹었다. 그 순간 많이도 놀라고 아파했을 조개의 마음이 스친다. 나와 연배가 비슷한 메리의 이모는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바다 그 너머 세상을 보는 듯,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길게 목을 빼고 바다를 응시하곤 했다. 그녀도 예쁜 돌과 조개껍데기를 줍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깨어진 유리조각이었다.

유리조각은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지도 않고, 날카로운 모서리도 없다. 병 조각에는 긁힌 수많은 자국이 있다. 모서리는 닳고 닳아 둥글어졌고, 윤기 나는 몸통은 빛을 잃어버렸다. 파도에 쓸리고 모래알에 쓸리어 원래의 날카로움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 듯하다. 불투명한 유리조각을 들고 있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수집품에 깜짝 놀란 나는 왜 그것을 줍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바다에 오면 잘 연마된 유리조각을 줍는다고 했다.

누군가의 상처 난 가슴이 치유가 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줍게 돼요.” 그녀는 세상살이가 이와 같지 않을까요.” 라고 덧붙였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유리 조각이 다시 아름다워지는 모습이 좋았고, 깨졌다고 해서 끝난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수집하게 되었다는 말에서 깊은 성찰이 느껴졌다. 메리의 이모는 연극배우라서 사물 하나를 보더라도 시각이 남다르다고 생각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삶은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다 힘들다고 했지만, 이혼녀로서 딸 하나를 키운다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유리 파편을 집어 올릴 때마다 이건 다 지난 상처야. 이제 더는 아프지 않아라고 속삭였을 것 같다.

메리 이모는 사각형에 가까운 유리조각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파도에 흔들리면서 모래알 사이에서 자신을 잘연마해온 작은 조각이 내 손 안에서 반짝였다. 문득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삶도, 나의 삶도, 이런 유리조각 하나쯤 쥐고 오늘을 살아내는 건지도 모른다고.

보들레르는 자신의 영혼을 금이 간 종에 비유했다. 금이 간 영혼은 큰소리로 이야기해도 잦아들기만 한다고 토로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금이 간 영혼을 달래기 위해 글을 썼다. 나도 언젠가 한 번은 깊이 금이 간 적이 있다.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었다. 그때 나는 하루에 몇 장씩 일기를 썼다. 아무도 모르게 일기장에 기대어 낯선 분노와 슬픔 같은 감정들을 흘려보냈다. 그 감정의 파편들은, 빛나지도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오래도록 가슴속 어딘가를 짓누르고 있었다.

메리 이모에게 삶의 지혜를 배운 후 나 역시 깨어진 유리 조각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매일 부딪히는 말들,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 금이 가고 깨어지는 마음, 언젠가 한 번쯤 부서진 채로 버려졌지만, 세월이라는 물결에 쓸리고 쓸려 모난 부분은 닳아지면서 나 자신을 곧추세울 수 있었다.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상흔이 아로새겨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병조각을 줍는 행위는 자신을 비우는 일이기도 하다. 연극하는 메리이모에게 유리조각은 상처가 지나간 자리이며 슬픔이 닿은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유리조각을 줍는 일은 부서진 것들을 놓아주고, 자신의 내면을 정화하는 의식이었음을 깨달았다.

서해안이나 동해안에서 주운 유리조각이란 것이 대부분 초록색이거나 푸르스름한 소주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깨어진 병조각은 때론 무기가 될 정도로 그 단면이 날카롭다. 드러낸 단면에서 번뜩이는 빛은 두려움마저 든다.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낼 것만 같다. 날카로운 유리가 바다를 떠돌면서 비정형의 모서리가 점차 사라지면서 시퍼렇던 상처도 점차 아물고, 아픔은 둥글어져 간다.

바닷가에서 주워온 병조각들을 통에 담아 화장대 위에 올려두었다. 마음이 아플 때면 하나씩 꺼내어 들여다보고 만져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상처를 견뎌낸 한 사람을 대하고 있는 느낌이다. 누군가의 심장과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 날 선 마음을 접어가며 밤마다 흘렸을 슬픔 혹은 눈물의 무게를 떠올려본다. 그 누군가는 이면서 세상의 존재들이다.

생로병사의 한중간에 서 있는 존재인데 아프지 않다고, 슬프지 않다고, 괴롭지 않다고, 마냥 행복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세상의 바람과 모래와 파도에 맞서 자신을 둥글게 만들어가는 과정은 조각가가 한 부분을 끌로 쪼아 없애고, 또 한 부분을 끌로 긁어내고, 연마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우린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삶이란 자신을 다듬고 깎아내는 고요한 수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깨졌다고 끝난 것도 아니고, 빛난다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를 아프게 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간을 통해 배운다. ‘조각가처럼 너의 영혼을 조각하는 것을 멈추지 말라는 플로티누스를 떠올린다. 얼마 동안 조각해야 아름다운 영혼이 될까 <에세이문학 202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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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정

 수필공원(현 에세이문학) 등단(1998), 인간과 문학평론으로 등단(2023), 건대 문학치료학과 졸업(석사), 한국문학치료학회 정회원

 

저서: 답일소》 《외로운 존재는 자신을 즐긴다 》 《터키, 낯선 시간에 흐르다》 《세계 문호와의 가상 인터뷰》 《시간을 걷는 유럽인문여행외 다수, 현대수필문학상 수상(31), 서울교대 평생교육원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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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9) 김정애 '상처의 마모, 그 찬란한 ‘되기’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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