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13) 권대근 ‘이것이 이중구조 수필이다’]
한청수 <동네 돼지>를 읽다
권대근/문학평론가
수필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문학 장르다. 그러나 체험의 진실성이 곧바로 감동으로 환원되지는 않는다. 진정성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이 아니다. 동일한 체험이라도 어떤 이는 기록에 머물고, 어떤 이는 예술에 도달한다. 그 차이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구조다. 체험이 어떤 배열과 긴장 속에 놓이는가에 따라 서사의 밀도와 의미의 깊이가 달라진다. 한청수의 <동네 돼지>는 이중구조를 뼈대로 한 본격수필이다. 수필창작에서 감동을 생성하는 핵심 장치의 하나가 ‘이중구조’다. 이중구조란 표면 서사와 심층 서사가 상호 교차하거나 병치되면서 의미의 긴장을 형성하는 구성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사건 전개를 넘어, 경험의 외형과 사유의 내면이 동시에 작동하는 서사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이중구조는 한 편의 수필 안에 두 개의 층위를 설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두 구조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비추며 긴장을 형성한다. 이러한 구조는 로만 잉가르덴이 말한 예술작품의 ‘공백’ 이론과 접점을 이룬다. 작품은 의미를 완결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일정 부분을 비워 둠으로써 독자의 참여를 유도한다. 수필의 표층 서사는 사실을 제시하지만, 그 사실의 궁극적 의미는 심층 구조를 통해 암시될 뿐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때 독자는 해석의 주체로 개입하게 되며, 감동은 이 참여적 해석 행위에서 발생한다. 또한 폴 리쾨르의 서사적 시간 개념은 이중구조의 시간성을 설명하는 데 유효하다. 리쾨르는 이야기된 시간과 경험된 시간이 재구성될 때 인간의 시간 인식이 심화된다고 보았다. 수필에서 현재의 장면과 과거의 기억이 교차하는 순간, 시간은 단선적 흐름을 벗어나 중층적 구조를 형성한다. 이 중첩 속에서 사건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현재적 의미로 재탄생한다. 나아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는 이중구조의 윤리적 차원을 설명한다.
외적 사건이 단순한 체험을 넘어 타자에 대한 책임의 문제로 확장될 때, 표층의 정서는 심층의 윤리적 각성으로 전환된다. 이때 수필은 사적 고백을 넘어 공적 성찰의 차원에 도달한다. 이중구조의 이론적 틀을 실제 작품 한청수의 수필 <동네 돼지>에 적용해 보면, 그 구조적 작동 원리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 수필은 표층 서사와 심층 서사가 교차 확장되는 전형적인 이중구조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표층 구조는 크게 세 개의 장면군으로 구성된다. 첫째는 스페인 살라망카주의 중세 마을 라 알베르카에서 행해지는 ‘산 안톤’ 돼지의 전통이다. 매년 성 안토니오 축일에 풀어놓은 돼지를 마을 전체가 공동으로 키우고, 연말에는 가장 어려운 이웃에게 나누는 풍습이 소개된다. 둘째는 화자의 유년 시절, 두메산골 마을에서 이루어졌던 ‘한 숟가락 밥’의 기억이다. 가난한 영호네 가족을 위해 동네 사람들이 각자의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 채워주던 장면이 서사의 중심을 이룬다. 셋째는 현재 시점에서 케냐의 후원 아동 ‘사닷’을 돕는 이야기다.
이 세 장면은 지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스페인의 중세적 공동체, 한국 농촌의 유년 기억, 그리고 아프리카 케냐의 현재적 후원이라는 이질적 공간과 시간이 병치된다. 그러나 바로 이 병치가 표층 구조의 배열 전략이다. 돼지라는 매개, ‘함께 키운다’는 행위, 그리고 ‘연말의 나눔’이라는 행위는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반복되며 점차 상징성을 획득한다. 여기서 이중구조의 심층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적 책임’과 ‘이름을 지워주지 않는 배려’라는 윤리적 의미다. 스페인의 전통은 단순한 민속 소개가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의 ‘불쌍함’을 드러내기보다, 가난이 한 사람의 정체성이 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이미 윤리적 해석의 층위를 내포한다. 표층에서 돼지는 사육되는 가축이지만, 심층에서 그것은 공동체가 함께 길러내는 연대의 상징이다.
이 작품의 구조는 로만 잉가르덴이 말한 ‘공백’의 미학과 맞닿는다. 작가는 직접적으로 “연대가 중요하다”거나 “공동체적 사랑이 필요하다”고 설교하지 않는다. 대신 돼지를 풀어놓는 장면, 한 숟가락씩 덜어내는 손길, 후원 카드 속 아이의 눈빛을 제시할 뿐이다. 그 사이의 의미는 독자가 스스로 연결하도록 남겨 둔다. 표층의 장면들이 서로를 비추는 순간, 독자는 ‘이것이 같은 이야기임’을 깨닫는다. 감동은 설명이 아니라 이 연결의 자각에서 발생한다. 또한 작품은 시간의 중첩이라는 측면에서 폴 리쾨르의 서사적 시간 이론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스페인의 현재적 전통은 화자의 과거 기억을 호출하고, 그 기억은 다시 현재의 케냐 후원이라는 실천으로 이어진다. 과거의 ‘한 숟가락 밥’은 현재의 ‘한 장의 카드’로 변주된다. 시간은 단선적으로 흘러가지 않고, 회상과 현재가 교차하면서 의미를 재구성한다. 결국 유년의 공동체 경험은 현재의 윤리적 선택을 가능하게 한 토양으로 드러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와도 상통한다. 영호 엄마의 뒷모습, 배고픈 아이들의 숨소리, 그리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케냐의 아이는 모두 ‘타자의 얼굴’로 제시된다. 이 얼굴은 동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응답을 요구한다. 스페인의 돼지 사육 전통, 마을의 한 숟가락, 그리고 해외 후원은 모두 타자에 대한 응답의 방식이다. 표층의 사건은 심층에서 윤리적 각성으로 전환된다. 이 작품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돼지’라는 사물의 상징적 변주다. 스페인의 돼지는 공동체가 함께 키우는 실재적 동물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이르면 화자는 “나는 스페인 ‘산 안톤의 돼지’를 키우듯 케냐에 돼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돼지는 더 이상 가축이 아니다. 그것은 ‘한 생명을 향한 지속적 관심’의 은유로 전환된다. 동일한 사물이 다른 맥락에서 반복되며 상징적 응집력을 얻는 전형적 사례다. 이는 이중구조에서 말한 상징의 축적과 심화가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준다.
결국 <동네 돼지>의 표층은 공동 사육과 나눔의 풍습에 대한 서술이며, 심층은 공동체적 윤리와 연대의 확장이다. 스페인에서 한국 농촌으로, 다시 아프리카로 이어지는 서사적 이동은 단순한 공간 이동이 아니라 의미의 확장이다. 표면의 돼지는 지역적 전통이지만, 심층의 돼지는 세계적 연대의 상징이 된다. 이처럼 이중구조는 단순히 두 개의 이야기를 병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하나의 윤리적 중심을 향해 수렴하도록 설계하는 구조적 전략이다. <동네 돼지>는 체험의 진실성을 넘어, 구조적 배열을 통해 감동을 숙성시킨다. 독자는 세 장면을 통과하며 하나의 질문에 도달한다. “나는 지금 누구의 겨울을 함께 키우고 있는가.” 바로 그 질문이 생성되는 지점, 그것이 이중구조가 완성되는 자리다.
이중구조는 수필 창작의 기술적 기법을 넘어선 미학적 원리다. 사건은 표층에서 전개되지만, 의미는 심층에서 형성된다. 두 구조가 긴장 속에서 상호 작용할 때, 독자는 단순한 독해를 넘어 해석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감동은 체험의 크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구조 속에서 숙성된다. 표면과 심층, 사건과 사유, 현재와 기억이 서로를 비추는 이중적 배열 속에서 한청수 수필은 비로소 예술적 완결성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중구조란 삶의 외형을 통과해 그 이면의 존재론적 떨림에 이르고자 하는 서사적 전략이며, 수필을 기록에서 문학으로 전환시키는 핵심 원리라 할 수 있다.
▮권대근 주요 약력
△경남 남해 출생 △'동양문학' 수필 등단(1988) △'문예사조' 문학평론 △'경북신문' 문학평론 △미주 '중앙일보' 수필 신춘문예 당선 △현재 대신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 △세계한글작가대회 집행위원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번역서 '한국의 명수필', △문학이론서 '문장가로 가는 길' △수필집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등 28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월강문학상, △여산문학상, △정과정문학상, △부산pen번역문학상 등 수상
▮한청수/동네 돼지
스페인 살라망카주의 중세 마을 라 알베르카에는 마을 전체가 돼지 한 마리를 함께 키우는 독특한 전통이 있다. 매년 6월 13일 성 안토니오 축일에 축복받은 새끼 돼지 한 마리를 마을 거리에 풀어놓는다. 이 돼지는 '산 안톤'이라 불리며, 약 7개월 동안 마을 거리를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마을 주민들과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빵과 물을 먹고 살을 불리며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돼지가 된다. 추운 밤에는 주민들이 자신의 집에 잠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겨울이 오면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은 유난히 분주해진다. 눈에 띄는 건 화려한 조명도, 관광객도 아니라, 마을 사람들 사이를 조용히 오가는 약속들이다. “올해도 같이 키우자.” “이번 주엔 내가 먹이 줄게.” 누구도 크게 말하지 않지만, 서로가 알고 있는 일들이 있다. 한 해 동안 마을이 힘을 모아 돼지 한 마리를 공동으로 사육하고, 연말 축제 기간에 그 고기와 식료품을 꾸려 동네에서 가장 어려운 이웃에게 선물하는 일. 축제는 그때 비로소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함께의 온기’가 된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조금 놀랐다. 누군가의 불쌍함을 드러내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오히려 가난이 그 사람의 이름이 되지 않도록 배려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누가 받는지’보다 ‘모두가 마음을 모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여겼다. 공동 사육이라는 단순한 노동은 연말의 선물보다 먼저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 날씨가 궂은 날도 있었고, 일이 바쁜 날도 있었지만, 그 작은 약속들이 쌓여 ‘누군가의 겨울’을 지켜주는 큰 울타리가 되었다. 함께 조금씩 시간을 내고, 작은 부담을 나누고, 그 작은 꾸러미를 ‘당연한 듯’ 건네는 일. 그 소박함 속에 진짜 따뜻함이 있다.
내가 태어난 곳 지도에서도 한참을 더듬어야 닿는, 시골의 끝자락 같은 그곳은 흙냄새와 바람의 결이 먼저 떠오르는 곳이다. 겨울이면 바람이 뼈마디를 두드렸고, 여름이면 볕이 마당의 그늘까지도 뜨겁게 달구었다. 열두 가구가 사는 가난에 찌든 두메산골, 마을 공동우물 옆에 영호네가 살고 있었다. 무릎 아래 수동다리 한쪽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아 일할 수 없는 아버지와 내종을 앓고 있는 어머니, 일곱 남매는 늘 배가 고팠다. 어쩌면 “살아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어린 것들이 너무 많아, 집안은 늘 작은 숨소리와 배고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과 집 사이가 멀지 않았고, 누구네 마당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나면 온 동네에 금방 스며들었다.
영호 엄마는 밥이 떨어지는 날이 오면, 말없이 빈 소쿠리를 들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종종 기억한다. 미안함을 삼키는 사람의 등은 왠지 더 작아 보였다. 어머니의 걸음이 빠르지 않았던 것은, 다리가 아파서만이 아니라 마음이 무거워서였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 빈 밥 소쿠리는 늘 가득 채워져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의 밥그릇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냈다. 한 숟가락, 정말 적은 사랑의 나눔이 모여 영호네 집의 하루가 되었다. 그 한 숟가락에는 밥만 담긴 게 아니었다. “괜찮다”, “살아라”, “어린 것들은 먹어야지” 같은 말들이 함께 담겨 있었다.
가난은 사람을 외롭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더 사람답게 묶어 주었다. 누군가를 도울 힘이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돕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며 영호네 칠 남매는 그렇게 자랐다. 온 동네의 손길이 일곱 아이를 키웠다. 밥을 나누어 준 손, 감자를 쥐여 준 손, 울고 있는 아이를 잠깐 안아 준 손, 어머니 대신 머리를 묶어 준 손 그 손들이 모여 하나의 큰 품이 되었고, 그 품이 일곱 아이를 넘어지지 않게 받쳐 주었다.
돌이켜 보면, 그 시절은 슬픔이 많은 대신 온기가 많았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만큼 마음이 더 오갔고, 각자의 삶이 팍팍했던 만큼 서로의 사정을 더 잘 알아보았다. 지금도 가끔 밥 냄새가 진하게 퍼지는 날이면, 나는 어머니의 밥그릇에서 반이나 펴내어 주시고 숭늉으로 배를 채우시든 그 마음을 떠올린다. 한 숟가락씩 모아주던 밥, 그 밥의 온도, 밥그릇이 부딪치며 내던 작은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삶을 살게 해주던 조용한 마을, 누군가의 손길이 곧 누군가의 숨이 되어 배고픔을 조금씩 밀어내 주었다. 아이들은 ‘남의 밥’이 아니라 ‘마을의 밥’을 먹고 자랐다.
나는 스페인 ‘산 안톤의 돼지’를 키우듯 아프리카 케냐에 새까만 돼지 한 마리를 키우고 있다. 어린아이 때부터 후원해 온 ‘사닷’이다. 직접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아이지만, 해마다 연말이 되면 사닷은 자신의 시간을 카드 한 장에 담아 보내온다. 어제보다 조금 커진 키, 전보다 또렷해진 눈빛, 낯설지만 정직한 미소. 그 카드 위에는 말보다 먼저 자란 시간이 붙어 있다. 처음엔 그저 사진 속 아이였다. 그러나 해가 바뀔수록 사닷은 숫자가 아니라 계절이 되었고, 소식이 아니라 기다림이 되었다.
나는 먼 곳에서 그 아이의 성장을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이 되었다. 내가 보내주는 적은 정성을 먹고 아이는 스스로 자라 나에게 안부를 건넨다. 사닷이 보내오는 카드를 받을 때마다 사랑은 손을 잡지 않아도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한 아이가 무사히 커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 해의 끝은 충분히 따뜻해 진다. 그 아이의 내일이 오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바라며, 우리가 함께 키우는 돼지들이 세상의 아픔을 밀어 올리는 그날이 오기를, 또 한 마리의 ‘산 안톤’을 조용히 기다린다.

▮ 한청수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 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에세이문예작가상 수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