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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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차숙의 수필 '르누아르의 전통과 폴 세잔의 실험' 현대수필 봄호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16) 권대근 ‘대조 속에 빛나는 구조, 사유 속에 완성되는 수필’

오차숙의 수필 <르누아르의 전통과 폴 세잔의 실험>

 

 

 

권대근/문학평론가

 

오차숙의 이 수필 <르누아르의 전통과 폴 세잔의 실험>은 미술 감상에서 출발하여 문학의 본질과 글쓰기의 방향을 사유하게 만드는 본격수필로서 높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글은 한 전시장에서 시작된 개인적 체험을 단순한 감상 기록에 머물게 하지 않고, 예술의 두 원리인 ‘전통’과 ‘실험’이라는 미학적 문제로 확장한다. 이러한 확장은 체험을 사유로 전환하는 본격수필의 핵심적 특성을 잘 구현하고 있으며, 구조적 완결성과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뛰어난 점은 구조미학적 설계에 있다. 이 수필은 ‘전시 관람 -> 두 화가의 대비 -> 미술사적 평가 -> 수필 문학에 대한 성찰 -> 글쓰기의 존재론적 질문’이라는 단계적 구조를 취한다. 처음에는 한가람미술관에서의 단순한 관람 체험으로 시작하지만, 곧 두 화가의 예술적 태도를 대비시키며 의미의 축을 세운다. 이러한 대비구조는 글 전체의 중심 장치로 작동한다. 르누아르의 세계는 밝고 따뜻하며 감각적이고, 세잔의 세계는 구조적이고 탐구적이며 실험적이다. 작가는 이 두 화가의 예술 세계를 병치하면서 독자에게 미적 긴장과 사유의 확장을 동시에 제공한다. 즉 이 수필은 단순한 설명적 미술 감상이 아니라, 두 개의 예술 원리가 서로를 비추는 ‘대조의 구조’를 통해 의미를 생산하는 글이다. 이러한 이중구조적 설계는 본격수필이 지향하는 구조미학의 중요한 성취라 할 수 있다.

특히 르누아르와 세잔의 대비는 단순한 화가 비교에 그치지 않고 문학적 의미로 확장된다. 르누아르의 회화는 전통수필에 비유되고, 세잔의 회화는 실험수필에 대응된다. 이러한 비유는 매우 설득력 있는 미학적 전환을 만들어낸다. 르누아르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친근함과 조화는 기승전결을 갖춘 전통 수필의 구조와 연결되며, 세잔의 파격적 시선과 구조 탐구는 형식 실험을 추구하는 현대수필과 연결된다. 이처럼 미술과 문학이라는 서로 다른 장르를 연결하여 예술의 본질을 설명하는 방식은 수필이 지닌 사유적 확장성을 잘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예술의 형식과 정신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는 사유의 글이라는 점에서 본격수필의 수준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한 이 작품은 체험과 해석의 균형이 매우 안정적이다. 본격수필은 체험의 진정성과 사유의 깊이가 결합될 때 비로소 성립한다. 이 수필은 한 미술관 방문이라는 개인적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지만, 곧 화가의 생애와 미술사적 의미를 연결하고, 다시 그것을 문학적 논의로 확장한다. 이러한 확장 과정은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체험이 사유를 낳고, 사유가 다시 예술의 보편적 문제로 이어지는 흐름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수필이 단순한 개인적 기록이 아니라 ‘체험의 해석된 형식’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문학적 성취라는 측면에서 이 글의 또 하나의 강점은 사유의 윤리성과 균형 감각이다. 작가는 전통과 실험 중 어느 하나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 예술의 가치를 동시에 인정하며, 각각이 예술사에서 수행한 역할을 공정하게 바라본다. 르누아르는 인간에게 기쁨과 위안을 주는 예술의 가치를 보여주고, 세잔은 예술의 구조와 본질을 탐구하는 정신을 보여준다. 이러한 균형적 시각은 수필의 사유가 교조적 주장으로 흐르지 않게 하며, 독자에게 열린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이는 본격수필이 지향하는 ‘타자 지향적 사유’와도 연결된다.

또한 작품의 결말 역시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적이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는 예술과 글쓰기를 동일한 질문 속에 놓는다. ‘즐거움을 줄 것인가, 진실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한 수사적 장치가 아니라 글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적 문제로 기능한다. 이 질문은 르누아르와 세잔의 대비에서 시작되어 결국 작가의 글쓰기 태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글은 어떤 결론을 단정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예술에는 정답이 없으며 각자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면 된다는 여백을 남긴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독자의 사유를 지속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는 교훈적 결론 대신 질문과 여백을 남기는 본격수필의 미학적 특징을 잘 구현한 부분이다.

언어의 측면에서도 이 수필은 안정된 문학성을 보여준다. 문장은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으면서도 이미지와 의미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 “르누아르의 그림 앞에서는 미소가 번졌고, 세잔의 그림 앞에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라는 문장은 두 화가의 예술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글 전체의 대조 구조를 미리 제시한다. 또한 “전통은 현재를 풍요롭게 드러내고, 실험은 미래를 여는 열쇠”라는 문장은 글 전체의 핵심 사유를 압축한 문장으로 기능한다. 이러한 문장들은 과도한 설명 없이도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하며, 수필 문장의 밀도를 높인다.

이 글이 명수필로 평가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체험 구조 사유 언어가 균형 있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 체험에서 출발하여 미학적 문제로 확장되는 사유의 깊이, 두 화가의 대비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는 구조미학적 설계, 그리고 독자의 사유를 열어 두는 결말은 본격수필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조건을 충실히 구현한다. 특히 미술과 문학을 연결하여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는 방식은 수필 장르가 지닌 철학적 가능성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작품은 미술 감상을 통해 글쓰기의 본질을 묻는 수필이다. 르누아르와 세잔의 대비는 단순한 화가 비교가 아니라 예술의 두 방향, 즉 아름다움의 예술과 진실의 예술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두 길을 대립시키면서도 동시에 조화롭게 이해하려 한다.

이러한 사유의 깊이와 구조적 완성도는 이 작품을 단순한 감상문이 아니라 문학적 성취를 갖춘 본격수필의 한 예로 평가하게 만든다. 따라서 오차숙의 <르누아르의 전통과 폴 세잔의 실험>은 체험의 해석, 대비 구조의 미학, 열린 사유의 결말을 통해 예술과 글쓰기의 본질을 탐구한 수준 높은 수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전통과 실험이라는 두 미학적 축을 통해 수필 문학의 가능성을 성찰하게 하는 작품이며, 바로 그 점에서 문학적 성취가 뛰어난 명수필로 평가될 만하다고 하겠다.

 

▮권대근 주요 약력

 

△경남 남해 출생 △'동양문학' 수필 등단(1988) △'문예사조' 문학평론 △'경북신문' 문학평론 △미주 '중앙일보' 수필 신춘문예 당선 △현재 대신대학원대학교 특임교수 △한국본격문학가협회 회장 △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역위원회 명예회장 △평론집 '수필은 사기다', 번역서 '한국의 명수필', 문학이론서 '문장가로 가는 길' △수필집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등 28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펜문학상, 월강문학상, 여산문학상, 정과정문학상, 부산pen번역문학상 등 수상

 

 

 

▮오차숙의 르누아르의 전통과 폴 세잔의 실험

 

한가람 미술관에 다녀왔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두 화가의 작품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르누아르 그림 앞에서는 미소가 번졌고, 세잔의 그림 앞에서는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그들은 ‘인상파’라는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작품의 세계는 전혀 달랐다. 르누아르의 캔버스에는 무도회장에서 춤추는 사람들, 선상 파티에서 와인잔을 기울이는 연인들,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녀들의 맑은 얼굴이 있었다. 르누아르의 작품에는 아름다운 순간들이 포착되어여 영원으로 만드는 마법이 있었다. 붓터치가 부드러운 전통수필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생각이 들었다. 기승전결이 있고 주제가 분명하여, 전통 수필의 미덕을 갖추고 있었다.

르누아르는 가난한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도자기 공장에서 일해야 했던 소년으로, 화가가 되기까지의 길은 험난했다. 그러나 그는 루브르 박물관의 거장들을 보며 꿈을 키웠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의 그림에는 고통보다는 기쁨, 어둠보다는 빛이 넘쳤다. 그는 예술이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전통 수필이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정제된 언어로 전하는 것처럼, 르누아르는 화폭에 일상의 행복을 담아낸 화가였다.

하지만 세잔은 같은 시대, 같은 인상파 그룹에서 출발했지만, 그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세잔의 캔버스 앞에 서면 그 기법이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사과가 삐뚤어져 있고, 테이블이 기울어져 있었으며, ‘생 빅투아르 산’도 여러 개의 시점에서 그렸지만, 동시에 보였다. 편안함 대신 긴장감, 아름다움 대신 본질과 진실이 있었다. 세잔은 그림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대로 그리려고 했다. ‘자연을 원통, 구, 원뿔로 다루라’는 그의 말은 대상의 겉모습이 아닌, 본질적 구조를 파악하려는 의지의 표현대로 드러났다.

세잔의 그림은 이 시대 실험수필과 비슷했다. 실험수필처럼 기존의 문법을 거부하고, 형식을 해체하며, 독자에게 불편함을 감수하게 했다. 하지만 특유의 불편함 속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숨어 있었다. 한 개의 사과를 그리기 위해 백 번 이상의 스케치를 하고, 한 풍경을 수십 번 반복해서 그린 세잔의 집요함이 대단했다. 이 시대 수필가들이 언어의 한계에 도전하고, 새로운 기법을 모색하며 글을 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흥미로운 것은 두 화가의 미술사적 운명이다. 르누아르는 생전에 명성과 부를 얻은 화가이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을 사랑했기 때문에 높은 가격에 팔렸다. 반면 세잔의 그림은 오랫동안 사랑받지도 이해받지도 못했다. 동료 화가들조차 그의 그림을 묘하게 여겼다. 하지만 역사는 세잔을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기록했다. 피카소의 입체파는 물론, 그 이후 여러 가지 추상미술도 세잔의 실험에서 비롯됐다. 세잔은 현대미술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화가가 된 것으로 유명했다.

그럼, 그들의 전통과 실험의 차이는 무엇일까.

전통은 현재를 풍요롭게 드러내고, 실험은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생각된다. 르누아르의 그림이 보는 이들에게 즉시 기쁨을 준다면, 세잔의 그림은 보는 사람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전통수필이 삶의 지혜를 전달하는 그릇이라면, 실험수필은 형식의 경계를 다소 무너뜨리며 수필의 영토를 개척해 간다.

그러나,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르누아르 없는 미술사를 상상할 수 없듯, 세잔 없는 현대미술사도 존재할 수 없다. 수필도 전통수필이 주는 위안과 완결미를 선호하는 독자가 있는 반면, 실험수필이 주는 자극과 새로움을 갈구하는 독자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들은 치열했다. 르누아르는 말년에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붓을 손에 묶어가며 세상 하직하기 직전까지 장밋빛 누드화를 그렸다. 세잔 역시 일흔이 넘어서도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리기 위해 매일 산으로 갔고, 결국 폭풍우 속에서 쓰러져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걸어갔다.

수필쓰기도 다를 바 없다.

전통의 미덕을 지키며 독자에게 위안을 주는 글이 있는가 하면, 형식을 파괴하며 새로운 표현의 지평을 열어가는 글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며 그것에 집중한다. 그럼, 르누아르처럼 사물의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글을 쓸 것인가, 아니면 세잔처럼 사물의 본질을 파고들며 새로운 철학과 시각을 제시할 것인가. 아니면 그 둘을 융합할 것인가.

캔버스든 원고지든, 모든 것은 작가의 성향과 정신이다. 루느아르는 ‘나는 즐거움을 그린다’고 말했고, 세잔은 ‘나는 진실을 그린다’고 말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독자에게 즐거움을 줄 것인가, 아니면 진실과 직면하게 할 것인가. 그 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정답이 없으므로, 각자가 선택한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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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수필 봄호

▮오차숙

△현재, <계간현대수필> 발행인 △창조문학 시 (1995), 현대수필 (1997) 수필, 2008년 평론 등단 △현재, 서초문화원 수필창작반 강사 △수필집, 시집, 저서: <음음음음 음음음>, <실험수필 코드 읽기> 외 12권 △석사 논문: <윤재천 실험수필론>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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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평론가가 추천하는 명수필(16) 권대근 ‘대조 속에 빛나는 구조, 사유 속에 완성되는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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