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4-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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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청수 수필가는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 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에세이문예작가상 수상

목련과 모란 사이

 

한청수/수필가

 

긴 겨울을 밀어내고, 마침내 가지 끝에 매달린 목련 꽃잎들이 빛을 품는다. 아직은 여리고, 손을 대면 부서질 듯한 꽃잎들이 어쩌면 저리도 당당하게 햇살을 받아내는지, 바라보는 내 마음은 그 눈부심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자꾸만 뒤로 물러난다. 아름다움 앞에 서 있으면서도, 나는 그 끝을 먼저 떠올린다. 머지않아 바람 한 번에 흩어질 운명, 찬란함 뒤에 따라올 쓸쓸한 낙화를 미리 끌어와 가슴에 얹어 둔다.

한청수 사진 새로.png

봄은 분명 생명의 계절이라 했건만, 내 안의 시간은 아직 겨울의 그림자를 다 걷어내지 못한 듯하다. 꽃은 피어나는 순간에 이미 지는 길을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나를 편안하게 하기보다는 더 서늘하게 만든다. 왜일까. 나는 왜 지금, 이 순간의 환함보다, 아직 오지도 않은 사라짐을 더 또렷하게 느끼고 있는 걸까. 모란은 아직 피지 않았는데, 내 마음은 벌써 그 꽃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오지 않은 사람과 미지의 시절을 기다리듯, 알 수 없는 순간을 향해 조용히 손을 내민다. 기다림은 사람을 더 살아 있게 만든다. 오지 않았기에 더 또렷하고, 닿을 수 없기에 더 간절해지는 마음. 그래서일까, 모란이 피기 전의 시간은 이미 꽃이 핀 뒤보다 더 깊고 짙은 빛을 품고 있는 듯하다.

 

모란이 피고 나면, 그 아름다움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화려한 순간은 짧고, 빛나는 것은 먼저 스러진다는 것을. 꽃이 피기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그 끝을 함께 떠올린다. 활짝 핀 모란이 바람에 흔들리다 이내 꽃잎을 떨구고 말 장면을, 그 아래에 조용히 쌓여 갈 시간의 무게를.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 꽃이 피기를 기다린다. 우리는 피어남과 사라짐을 알면서도 그 사이의 찰나를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모란이 필 때까지, 나는 나의 어떤 계절을 견디고 있는 것일까. 그 꽃이 피는 순간, 나는 과연 그것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을까.

 

1960년대 포크 음악인 공동체 C‘est Si Bon 마지막 공연프로그램에서 조영남의 히트송 모란이 필 때까지를 후배가수가 헌정곡으로 불렀다. 노래는 끝났지만, 욕망과 찰나의 절정을 이루며 화려하게 피어 한번에 무너져 버리는 꽃잎은 인간의 덧없음과 허무를 말하며 피는 순간 이미 지는 운명을 품은 꽃같았다. 겹겹이 쌓인 꽃잎들이 숨이 찰 듯 부풀어 올라,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 온 힘으로 빛난다. 가까이 다가서면, 그 아름다움은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한다. 저토록 가득 찬 것은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찬란함 앞에서 나는 기쁨보다 먼저 이별을 떠올린다.

 

아파트 정문에서부터 정원에 목련이 서 있다. 아직 다 피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조용히 하늘을 향해 입을 다물고 있다. 서두르지 않고, 과시하지도 않는다. 기다리는 사람이 올 것을 아는 사람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배운다. 피어나는 일보다 더 긴 시간은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아직 시작되지 않은 시간을 조용히 견디며 하늘을 향한 기도와 응시로 외로운 꽃을 피우고 있다. 모란과 목련 사이에 서서 나는 문득 내 삶을 떠올린다. 나는 지금 피어나는 쪽에 서 있는가, 아니면 기다리는 쪽에 서 있는가. 우리는 두 꽃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떤 날은 모란처럼 온 힘으로 빛나고, 어떤 날은 목련처럼 조용히 버티며. 그 모든 시간이 모여 하나의 봄이 된다.

 

발걸음을 옮기다 문득 시선을 떨구면, 이미 떨어진 꽃잎들이 땅 위에 눕는다. 처음에는 바람에 실려 온 듯 가볍게 흩어져 있던 것들이, 사람들의 발밑에서 점점 색을 잃고, 물기를 머금고, 마침내 형체마저 흐려진다. 그 위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수많은 발자국들 속에서, 꽃잎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 그저 밟히는 무엇이 되어 간다. 나는 그 자리에 한동안 서서 움직이지 못한다. 저 꽃잎들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한때는 가지 끝에서 빛나던 꽃잎, 환하게 웃던 순간이 있었을 것들이, 지금은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스러져 간다. 그 모습이 마치 내 안 어딘가와 닮아 있어, 이유 없이 마음이 저려 온다.

 

다시 고개를 들면, 아직 나무 위에는 수없이 많은 꽃들이 햇빛을 머금고 있다. 떨어진 것과 남아 있는 것, 스러지는 것과 피어나는 것이 한 계절 안에서 함께 숨 쉬고 있다. 어쩌면 삶도 그와 같을 것이다. 지는 것을 피할 수 없기에 피어나는 것이 더 빛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도, 꽃을 보며 기쁨보다 먼저 아픔을 떠올리는 나 자신을 안고 선다. 아름다움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는 마음마저, 이 계절이 내게 허락한 또 하나의 진실일 것이다. 꽃이 피고 지는 사이, 나는 그저 조용히 서서, 내 안의 봄이 어디쯤 와 있는지 가늠해 본다.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주어진 시간 속에서 나만의 꽃을 조용히 피워 내고 싶다.

 

 

 

 

한청수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계간 에세이문예 신인상으로 수필가 등단, 한국본격문학가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생반 회원, 서울시교육청 산하 초등학교, 테헤란 한국학교 교사 근무, 문교부 장관 표창, 옥조근정훈장 수상, 한국교원 교육논문 금상, 에세이문예작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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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기자신문] 권대근 교수 추천, 이 한 편의 수필, 한청수 '목련과 모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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